지난 화요일 아침, 국회의원 후보자 물망에 오른 한 정치인이 교회를 찾았다. 교회는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진행 중이다. 도심지교회 특성상 ‘특별’이란 말이 붙어도 그리 많은 수가 모이지는 않는다. 어떤 마음이었든 간에, 예배당 입장과 동시에 혹시라도 자리했을 ‘정치적 의도’는 이내 포기됐을 것이다. ‘기도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말 속에 진심이 녹아있었고, 나는 그 진심을 믿었다. 그도 우리도 매우 진지했으며, 누구도 이 예배가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무엇을 기도했을까, 그는.
우리 교회는 이번 주간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질문들’을 뽑아 묵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첫 질문은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였다. 이 물음은 ‘나와 하나님 사이’를 다시 보게 한다. 그로써 내 위치와 상태를 더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다. 토마스 키팅 신부는 그의 책 ‘인간조건 관상과 변형’에서 “우리가 이 질문에 진심으로 대답하면 우리는 곧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영적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질문을 통해 기회를 주시는 것 같다. 질문은 ‘사유하게 하고, 대답하게 만든다.’
‘내가 서 있는 위치와 상태’를 바로 본다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자리를 안다’는 것이다. 그날 그 정치인은 ‘지지율과 추이, 판세와 흐름’에 요동치는 마음을 안고 교회를 찾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그가 기도 가운데 ‘제일 먼저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두 번째 질문은 ‘가인’에게 한 것이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창 4:9)?”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은 행위의 책임을 먼저 묻지 않으셨다. 대신 그와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이 어디 있는지 물으셨다. 가인은 거짓말로 답했다. “내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살인, 아우와의 관계 그리고 자기 속에 있는 진실마저 부정해 버렸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내게 호소하였다(창 4:10).” 나는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한 모든 종류의 은폐와 거짓에 대한 성서의 날카로운 대답을 듣는다. 거짓은 이미 하나님 앞에 폭로됐다.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인 것뿐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 대답을 하고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났다는 기록이다.
가인과 달리, 십자가를 목전에 둔 예수님의 기도는 대반전이다.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켰나이다(요 17:12).” 죽임당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늘로 올려진 ‘호소’가 됐다면,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진 ‘생명’이 됐다.
저마다 위대한 사람이 되어 비상하는 것을 꿈꾼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도 그렇다. 무엇이 위대한 일인가. 위대한 일은 위대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생각을 품은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다.
하나님의 첫 질문이 ‘나’를 되찾는 기회였다면 다음 질문은 ‘우리’를 회복하라는 부름이다. 나는 그 정치인이 진지하게 ‘우리’와 ‘우리 시대’를 생각했을 것이라 믿는다. 인사를 나누며 그에게 부탁했다. “언제든 가장 약한 사람들, 가장 아픈 사람들, 가장 낮은 사람들을 제일 먼저 생각하시고, 언급해 주시고, 앞장 세워 주세요. 진심으로 그렇게 해 주세요.”
그는 명심하겠다고 했다. 교회와 신앙지성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복음에 비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말해 줄 책임이 있다.
손성호 목사(서울 초동교회)
[시온의 소리-손성호] 정치인의 기도
입력 2016-03-24 1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