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2개월 전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올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공천 과정에 소수 권력자와 계파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못할 것”이라면서 “또한 우리나라 정치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계파정치도 사라질 것”이라고 ‘100% 상향식 공천제’를 자랑했다. 그는 또 “내가 대표로 있는 한 단 한 명의 전략공천도 없다”고 수차례 공언했다.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양치기 소년이 됐다. 뭐 하나 김 대표 말대로 된 게 없다.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칼춤에 김 대표의 트레이드마크인 국민공천제는 껍데기만 남고 단수·우선추천이란 이름의 전략공천이 난무했다. ‘배신의 정치’ 그물망에 걸려 비박 의원들이 이유도 모른 채 우수수 추풍낙엽 신세가 됐는데도 김 대표는 묵언으로 수수방관했다. 그는 공천이 사실상 마무리된 23일 저녁 기자회견에서 “수백 번 공천권을 100% 돌려드린다고 얘기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해 사과한다”면서 “다음 선거에선 이 약속이 반드시 지켜질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번에 못한 걸 다음에 지키겠다니 소가 웃겠다. 애초에 정치 생명을 걸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유승민 찍어내기’로 새누리당 공천이 사실상 마무리됐다. 최고위원회와 공천관리위원회가 끝까지 폭탄돌리기를 한 새누리당의 행태는 우리 정당사에서 가장 비겁하고 저열한 공천 사례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정당은 집권을 위해 존재한다. 선거에서 이겨야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 당선 가능성이 공천의 최우선 기준이 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번 새누리당 공천에선 이에 우선하는 기준이 생겼다. 박심(朴心)이다. 당선 가능성이 아무리 높아도 박심을 거스른 자는 살아남지 못했다.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 대구와 4·13 총선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에서 친박·진박 후보의 잇따른 경선 패배는 편향공천 하지 말라는 유권자의 경고였다. 그런데도 기어이 유 의원을 도려냈다. 조금의 다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오만의 극치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사회가 민주사회다.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고 지도자 한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사회는 전체주의다. 의견을 달리하는 건전한 비판 세력을 배신자로 낙인찍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한 건 나치가 그랬듯 새누리당을 친위대나 돌격대로 만들려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8년 전 데자뷔다. 2008년 18대 총선 후보 공천에서 친이계에 의한 친박 공천 학살이 이뤄지자 당시 의원 신분의 박근혜 대통령은 “정당정치를 후퇴시킨 무원칙한 공천”이라며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강하게 반발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당 민주주의가 제도로 정착하지 못하고 권력의 입맛에 따라 자의적으로 작동한 탓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도 예외는 아니다. 3김 시절에도 이런 공천은 없었다는 비판을 듣는 3당의 공천 과정을 보면 우리나라 민주주의 지수는 후진국 수준이다.
정의당은 원내정당 가운데 유일하게 공천 후유증을 겪지 않고 있다. 그 비결은 정당 민주화에 있다. 정의당은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를 당원들의 직접선거로 선출했다. 비례대표 후보 선출도 같은 절차를 밟았다. 당의 주인은 당원이다. 공천에 지도부 입김이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하지 않고 모든 경쟁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니 결과에 승복하고 뒤탈도 없다. 상향식 공천의 롤모델이다. 3당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의당처럼 하면 정당 민주주의 발전을 10년 이상 앞당길 수 있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
[여의춘추-이흥우] 정당 민주주의 벼랑에 서다
입력 2016-03-24 1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