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덕환 <2> 유도 시합서 승승장구… 영국팀 코치로 초청받아

입력 2016-03-24 17:53 수정 2016-03-24 21:02
유도에 막 입문했던 중학교 3학년 때 운동하던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정덕환 장로(뒷줄 가운데).

열심히 유도장을 다닌 나는 인정받을 기회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유도 기량이 빠르게 성장해 전국 유도사설도장 대항전에 출전하게 됐다. 각 도장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 2명씩 뽑아 리그전을 치르는 것인데 중학교 3학년인 내가 이 대회에 처녀 출전해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결승전에서 맞붙은 상대는 경희대 체육학과 대학생이었는데 그도 내게 업어치기 한판으로 패배를 당했다.

민관식 관장과 나를 지도한 김종천 사범은 크게 기뻐하며 내가 유도인의 길을 걷는 데 도움을 주셨다. 당장 소공동에 있던 대한유도회 도장에 나가 연습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곳엔 한국 유도계를 주름잡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의 기량도 이곳에서 다듬어졌고 당시 유도 명문고인 성남고에 특기생으로 스카우트됐다. 성남고 유도부 주장을 맡아 전국 대회에서 연전연승하던 나는 종주국 일본으로 건너가 가진 시합에서도 모든 상대를 가볍게 이겨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고교 3학년 때 이미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선발됐다.

각 대학에서는 나를 특기생으로 입학시키기 위해 좋은 조건을 제시했는데 난 망설이지 않고 고교 선배들이 많이 간 연세대를 택했다. 연세대 사학과 66학번 입학생이 된 나는 성격도 활발하고 리더십도 있었던 터라 총학생회 임원도 맡았다. 유명한 연고전이 있을 때면 온통 내 세상을 만난 양 활개를 치고 다녔다.

대학 2학년 때인 1967년 일본 관서지방 유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7전 전승으로 우승해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나의 주특기는 ‘왼쪽 낮은 업어치기’로 누구든 여기에 걸리면 여지없이 한판승으로 져야 했다.

당시는 보통 대학 2, 3학년 때 군대를 다녀오는 게 관례라 나 역시 2학년 말에 육군에 입대했다. 국가대표였기에 육군본부 소속 유도선수로 계속 운동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군생활을 하던 1969년 24세의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무렵은 그리 이른 나이도 아니었다. 신부는 디자인을 공부하던 김순덕이란 자매였는데 21세였다. 내가 누나와 통화한다고 하는 것이 전화를 잘못 걸어 전혀 모르는 여성과 연결이 됐고 내 전화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동생을 소개해준 것이다.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까지 태어나자 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한국에는 아예 상대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당시 누나와 매형이 영국에 살고 있었는데 매형의 연락을 받았다.

“처남, 한국에만 있지 말고 영국에 와서 한국유도를 알리면 어떨까. 내가 영국유도회 회장인 팔머씨를 만났는데 실력파인 처남만 좋다면 영국에 와서 유도 코치를 맡아 달라고 했거든. 숙식 등 모든 체재비는 여기서 책임지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좋은 조건인 것 같아.”

나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영국에 다녀와 유도 지도자의 길을 걷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가겠다고 승낙한 나는 1973년 3월 출발하기로 날짜까지 잡았다. 난 이제 국제적인 유도 지도자가 되어 돌아올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유도에 관한 한 최고라고 으스대며 목을 곧추세웠던 내게 엄청나고도 가혹한 사건이 기관차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1972년 8월 1일의 일이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