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구례를 찾았다. 산동면에 들어서면 산과 들이 샛노란색으로 물들어 있다. 들판과 마을에 일제히 화려한 ‘꽃폭죽’을 터뜨리듯 피어나 환한 꽃불을 달아맨 산수유다. 산동면 일대 30여개의 마을이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황금빛 물결을 이루고 있다.
‘산동’이란 지명은 1000년 전 중국 산둥성의 처녀가 지리산 산골로 시집오면서 가져온 산수유 묘목을 심었다고 해서 붙여졌다. 19번국도 변에 있는 계척마을의 아름드리 산수유 시목(始木)의 수령이 1000년 쯤 됐다. 할머니나무로 불리는 이 시목은 높이 7m, 둘레 4.8m로 가지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지지대에 의지하고 있지만 수령 수십 년의 젊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해마다 꽃을 활짝 피운다.
축제가 열리는 산동면 반곡·상위마을로 방향을 잡았다. 지리산온천랜드를 지나 평촌교에 이르자 언덕 위 대형 산수유꽃 모형과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산수유사랑공원이다. 이 곳에 오르면 노랗게 물든 마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산수유꽃담길이 시작된다. 방호정을 돌아 평촌교를 건너 대평·반곡마을을 돌아 다시 공원으로 돌아온다. 오래된 돌담 위에 늘어져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산수유꽃이 서정미를 더한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개울과 산수유 군락이 한 폭의 풍경화나 다름없다. 햇볕 내리쬐는 널찍한 바위에 앉아 산수유 꽃을 감상하는 봄처녀의 마음에 봄이 내려앉아 있는 듯하다. 개울가의 반석은 관광객과 사진작가들로 북적인다. 노란 산수유 꽃과 지리산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 모습도 심심찮게 보인다.
당골계곡 맨 꼭대기에 위치한 상위마을로 향한다.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100가구가 넘는 화전민촌을 형성했지만 지금은 30여 가구가 사는 소담한 마을로 남았다. 이끼 낀 돌담과 노란 산수유꽃이 대비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산수정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황홀하다. 금빛 꽃멀미에 아찔하다. 연인들은 셀카 찍기에 여념이 없고 가족들은 환한 웃음에 담소를 나누며 봄꽃 추억을 가슴에 담는다.
상위마을과 반곡마을 일대에는 ‘산동애가’라는 노래가 전해온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로 시작하는 노랫말이 애절하다. 여순사건 때 백부전이라는 19세 처녀가 토벌대에 끌려가며 부른 것이다.
산수유는 인근 달전마을에도, 견두산 아래 계척마을과 현천마을에도 온통 노란 꽃담을 두르고 있다. 비좁은 농로를 따라 가야 만날 수 있는 현천마을은 돌담이 있어 더 정겹다. 현천마을 입구에 있는 자그마한 저수지에서는 산수유꽃이 수면에 반영된 운치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마치 노란 구름이 내려앉은 듯 화사하다. 마을 곳곳에 대숲이 울창해 초록과 노랑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팔레트 위에 물감을 짜놓은 듯한 색채감도 느낄 수 있다. 이른 아침엔 몽환적 분위기도 연출된다. 안개가 낮게 깔린 아침, 지붕과 돌담길 사이를 물들인 노란 꽃잎은 황홀경을 더한다.
산수유나무는 일교차가 크고 배수가 잘 되는 해발 300∼400m 정도의 분지나 산비탈에서 잘 자란다. 지리산 자락 산동면 일원이 생육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산동면에서도 위안리는 국내 최대 산수유 군락지로 꼽힌다. 그중 만복대 기슭에 자리한 상위마을이 대표격이다. 수령 300년 이상 된 산수유들이 마을과 계곡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장관을 이룬다.
산수유꽃은 흥미롭다. 신기하게도 세 번 핀다. 먼저 꽃망울이 벌어지면 20여개의 샛노란 꽃잎이 돋아난다. 이후 수줍은 듯 미소 짓는 4∼5㎜ 크기의 꽃잎이 다시 터지면서 하얀 꽃술이 수줍게 드러난다. 꽃에서 다시 꽃이 피는 셈이다. 게다가 터진 꽃술은 왕관처럼 생겼는데 이 자태가 곱고 아름답다. 산수유를 모든 꽃이 닮고 싶어 하는 꽃 중의 꽃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봄에 화려한 색감으로 눈을 즐겁게 해준 산수유는 가을에 루비보다 붉은 열매를 맺는다. 10월 중순 이후부터 11월 말까지 수확된 햇볕이나 온돌방에 3∼4일 건조시킨 다음에 기계로 씨를 발라낸 후 과육의 수분 함수율이 15∼19% 정도 될 때까지 다시 햇볕에 말린다. 건조한 과육은 차 및 한약 등의 재료로 사용하며 약간의 단맛과 함께 떫고 신맛이 난다. 구례산수유는 전국 생산량의 73%, 수확면적의 84%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19일부터 27일까지 ‘영원한 사랑을 찾아서’란 주제로 ‘구례산수유꽃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관광객과 군민이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과 문화공연, 전시·판매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달전마을에서 가까운 수기리에 수락폭포가 자리잡고 있다. 산동면 소재지에서 4㎞거리다. 계곡을 따라가면 물소리가 우레같이 크게 들리고, 곧바로 수락폭포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 사이로 높이 15m에서 폭포가 끊임없이 물을 토해내 경외감이 든다. 날이 가물어도 일정한 수량을 유지할 정도로 물이 많아 여름철에는 물맞이 폭포로도 유명하다.
섬진강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광양시 다압면 청매실농원에 닿는다. 20㏊(6만평)에 달하는 너른 땅에 10만 그루가 넘는 매화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농원에 봄이 내려앉았다. 흰 구름처럼 피어난 매화로 장관을 이룬다. 매실된장, 매실고추장 등이 익어가는 장독 3000여개가 모여 있는 마당에서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매화는 어여쁜 자태에 반하고 그윽한 향에 취하는 꽃이다. 산수유가 향이 없는 반면에 매화는 향이 진하다. 달콤하고 산뜻한 매화 향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다. 청매실농원 일대에서 지난 18일부터 광양매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27일까지 이어진다. 섬진강을 따라 노란꽃·하얀꽃 향기에 흠뻑 젖어들 수 있다.
여행메모
축제 기간 섬진강 일대 교통지옥 염두… 산채·참게 매운탕·벚굴 입맛 유혹
수도권에서 구례로 가려면 경부-천안논산-호남-익산포항-순천완주고속도로를 잇따라 갈아탄 뒤 오수IC에서 빠져나간다. 17번 국도를 타고 남원까지 가서 19번 국도로 갈아타고 밤재를 지나면 구례다. 대전∼통영고속도로 함양분기점에서 88고속도로를 타고 남원까지 간 후 19번 국도를 달려도 된다. 산수유마을 인근에 3000명이 동시에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지리산온천이 있다. 지하 700m에서 뽑아 올린 게르마늄과 탄산나트륨 성분의 온천수는 피부병과 신경통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섬진강 변 산수유와 매화는 이미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이번 주말 화려한 꽃의 무릉도원을 볼 수 있다. 다만 축제 기간에는 섬진강 일대가 교통지옥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으니 염두에 둬야 한다. 눈요기를 한 뒤에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보자. 구례 일대에서는 지리산에서 나는 산채와 섬진강의 참게 매운탕이 유명하다. 광양에서는 강굴(벚굴)이 제철이다. 망덕포구에 강굴 내는 횟집들이 모여 있다.
구례·광양=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