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걸면 상대의 목소리보다도 먼저 통화연결음이 흘러나옵니다. 마치 대문처럼 사람들은 모바일메신저 프로필 화면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적어둡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화하는 유권자에게 정치인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봤습니다. 마음을 엿보기 위해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를 들여다봤습니다.
‘부산갈매기’와 ‘여수밤바다’
통화연결음으로 방정맞게 편곡한 ‘부산갈매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취재를 위해 더불어민주당 김영춘 부산시당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였습니다. 고요한 국회의사당 복도에 서서 속칭 ‘뽕짝’이라 부르는 멜로디를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부산갈매기. 부산갈매기. 너는 정녕 나를 잊었나” 스스로 ‘부산 정치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김 위원장은 그토록 현란한 노래를 전화하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야권의 존재감이 흐린 부산에서 그는 “벌써 나를 잊었냐”며 끊임없이 유권자들에게 기억을 환기시켰습니다. 야당 소속 영남 정치인의 절절한 구애가 구슬픈 음조에 묻어났습니다.
김 위원장은 2011년부터 야권의 불모지라 불리는 부산에서 지역구를 다져왔습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떨어졌고 2014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는 오거돈 전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후보직을 양보했습니다. 아직까지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한 것입니다. 경망스러운 전자음에 탬버린 소리를 얹은 부산갈매기가 흥겹기보다 애절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가장 낭만적이라고 평가받는 통화연결음은 국민의당 주승용 원내대표의 ‘여수밤바다’입니다.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이 바다를 너와 함께 걷고 싶어” 속삭이듯 흐느적거리는 ‘버스커버스커’ 장범준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야권 통합을 둘러싼 국민의당 내부 갈등은 아스라이 잊혀집니다. 어느새 화양면에서 화정면으로 이어지는 주 원내대표의 여수을 지역구 해안을 찬찬히 걷고 싶어집니다. 그래서인지 취재를 잊게 하는 ‘악마의 통화연결음’이라고도 불립니다.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너와 함께 걷고 싶다” 유권자를 향한 로맨틱한 귓속말이 그를 향한 여수의 표심을 두텁게 만들지는 앞으로 두고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박스럽지 않고 낭만적인 음률에서는 지역 기반이 탄탄한 3선 중진 의원의 여유로움이 느껴집니다.
“정치 할까 말까” 대통령의 아들들
최근 더민주 출마설이 돌았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 또한 통화연결음으로 속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걸 더민주 국민통합위원장의 통화연결음은 가수 김민기씨가 부른 ‘상록수’입니다. 단출한 피아노 선율에 김민기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얹혀 느릿하게 흘러나옵니다. 그의 아버지가 대통령이던 시절, 한 공익광고에 이 노래가 골프선수 박세리의 US오픈 우승 장면 배경음으로 나와 사회적 반향을 산 바 있습니다. 김대중정부의 3·1절 기념식 행사장에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통화연결음으로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상록수를 고른 그는 16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아버지가 생전에 늘 강조한 단결과 통합의 정신 구현에 제 힘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체념한 투로 나지막이 읊조리는 김민기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수화기를 넘어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독실한 기독교인답게 통화연결음으로 찬송가를 골랐습니다. 아버지인 김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매주 목사를 청와대로 초청해 예배를 하기도 했습니다.
김 교수는 새누리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했지만 최근 더민주행(行)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김무성 대표에게 “아버님의 무덤에 침을 뱉고 있다”고 해 새누리당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어 더민주 출마설이 도는 등 정치적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입니다.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그에게 전화를 걸자 단단한 목소리로 확신을 갈구하는 찬송가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만큼 김 교수의 정치적 고민 또한 깊어 보입니다.
새누리당은 ‘나라 사랑’
새누리당으로 눈을 돌리면 유독 애국심, 안보를 강조하는 컬러링이 많습니다. 최근 테러방지법 국회통과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이철우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봅니다. “반갑습니다. 전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국가정보원에서 20년을 근무하고 현재 국회 정보위원회 여당 간사를 맡고 있는 이 의원의 이력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김좌진 장군의 손녀이자 지금은 ‘삼둥이’ 할머니로 더 유명한 김을동 최고위원은 작사·작곡 미상의 독립군가를 택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팔을 위아래로 젓게 만드는 절도 있는 곡입니다. 김 최고위원은 전화 벨소리도 독립군가라고 합니다.
낭만파들도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정무특보를 지낸 김재원 의원의 통화연결음은 가수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입니다. 연결이 안 돼도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라는 가사로 위안을 삼습니다. 이 노래는 김 의원의 애창곡이기도 합니다.
의미심장 ‘카카오톡 상태메시지’
통화연결음만큼이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에도 정치인이 유권자에게 건네고픈 말이나 속사정이 드러납니다.
국민의당 최원식 수석대변인의 상태메시지는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입니다. ‘벼랑 끝에 매달린 손을 놓아야 대장부라 하리’란 뜻입니다. 인천 계양구을이 지역구인 최 대변인은 야권 분열로 총선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입니다. 더민주와의 통합이나 연대를 추진해야 당선이 가능하지만 두 당 모두 공천작업을 마무리해 당 차원의 협력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는 “이런 현실 속에서 후보단일화에 나설 분이 있을까 의문”이라고 해 야권연대 가능성을 접었습니다. 말 그대로 벼랑에 매달린 손을 놔버린 것입니다.
국민의당 정호준 의원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는 “고난은 축복의 시작”입니다. 원래 “고난도 잠시뿐”이었지만 14일 더민주 공천에서 탈락하자 바뀐 것입니다. 같은 당 송기석 전 판사는 “미래를 향한 담대한 변화”, 임승철 예비후보는 “필승! 야권교체 정권교체!”를 각각 상태메시지로 적어놨습니다.
재선에 도전하는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카카오톡 프로필에 ‘춘천의 힘(him) 두 배로 커진다’는 언어유희를 선보였고, 부산의 김도읍 의원은 ‘불철주야 지역과 나라를 위해 고민하겠습니다’는 다짐을 새겨놨습니다.
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
[슬로 뉴스] 유권자 향해 달달∼ 절절∼ 구애歌 흐른다
입력 2016-03-24 19:36 수정 2016-03-24 2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