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야근에… 회식에… 지친 샐러리맨 ‘드르∼렁’ 꿀잠

입력 2016-03-23 04:03 수정 2016-03-24 13:47
직장인들이 22일 점심시간에 CGV 여의도점 7관에서 안대를 한 채 소파형 객석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 이곳에선 낮 시간에 영화를 상영하는 대신 인근 직장인에게 낮잠 장소를 제공하는 ‘시에스타’ 이벤트를 하고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짹짹짹’ 새소리가 그치자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이어졌다. 캄캄한 어둠 속에 촛불 하나만 은은히 빛났다. 안대를 쓰고 의자를 조절한 다음 발을 죽 펴자 이내 졸음이 밀려왔다.

22일 정오 서울 여의도 금융가 한복판의 CGV 여의도점 7관. 남녀 10여명이 객석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모두 점심시간에 ‘낮잠’을 자러 온 직장인들이었다. CGV는 21일부터 19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시에스타’(siesta·스페인 등지의 낮잠 문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낮잠을 위한 영화관 입장료는 1만원이다.

20분쯤 지났을까. 나지막이 ‘드르렁’ 하는 소리가 울렸다. 회사원 이모(33)씨였다. 전날 회식 때 과음한 이씨는 이날 오전 7시20분 출근했다고 한다. 숙취에 시달리다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영화관을 찾은 터였다. 8시간 후 또 회식이 있다고 했다. 슬리퍼를 신고 담요를 덮은 채 잠을 자던 이씨는 오후 1시가 되자 “늦었다”며 황급히 일어나 사무실로 달려갔다. CGV 관계자는 “서비스 시작 후 매일 10∼20통 문의전화가 온다”며 “주로 30대 남녀 직장인에게 인기가 높다”고 했다.

새벽에 출근해 늦은 밤 야근과 회식에 시달리는 한국 직장인에게 ‘잠’은 항상 부족하다. 상사 눈치에 맘 놓고 쉬지 못하는 이들은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회사 주변의 쉴 만한 공간을 찾아 헤매고 있다.

1시간만 자고 싶다…사우나부터 룸살롱, 병원까지

지친 직장인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22일 오후 1시10분쯤 여의도 IFC몰 지하 3층 벤치에선 정장 차림의 황모(32)씨가 눈을 감고 있었다. 일부러 왕래가 없는 으슥한 곳을 골랐다. 황씨는 “점심시간은 1시까진데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로 30분 늦게 들어간다고 했다”며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려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20분 뒤 여의도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회사원 김모(42)씨는 “외근이 끝나 복귀해야 하는데 피곤해서 들렀다”며 “30분 정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으니 좀 살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 2017명을 조사한 결과 97%가 ‘근무시간 중 졸음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90%는 ‘근무하는 회사에 시에스타가 있으면 좋겠다’고 응답했다. 그만큼 피곤하게 살고 있고, 그 피로를 풀어줄 시설과 제도가 부족하다는 얘기다.

원래 지친 직장인의 도피처는 ‘사우나’였다. 서울 강남과 여의도 사우나는 점심시간마다 ‘4050 넥타이 부대’로 가득 찼다. 그러나 최근 ‘2030’ 젊은 직장인을 중심으로 5만∼10만원대 영양주사가 유행하고 있다. 강남 광화문 여의도 일대 피부과·내과를 찾아 주사를 맞으며 잠을 청하는 것이다.

낮 시간 여의도 일대 유흥주점 10여곳은 커피 등 음료를 주문하면 낮잠을 잘 수 있도록 룸을 제공하고 있다. 1시간여 쉬고 갈 수 있는 ‘수면 카페’도 강남과 여의도 일대에서 속속 생겨나는 중이다. 직장인 박모(35)씨는 “회사 휴게실은 상사들의 전유물”이라며 “회사 주변의 쉼터를 미리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하다”고 했다.

서울시의 낮잠 실험, 실패한 이유는

여론을 반영해 서울시는 2014년 8월 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낮 시간 ‘쪽잠’ 제도를 만들었다. 임신부나 야근 후 휴식이 필요한 직원이 상사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게 낮잠 시간을 보장하겠다는 거였다.

야심 차게 시작한 서울시의 실험은 2년 가까이 지난 지금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서울시 관계자는 22일 “지난해부터 부서별로 자율 시행토록 했다”고 말했다. 낮잠을 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하는 직원이 많아서였다. 30분 낮잠을 자면 30분 늦게 퇴근해야 한다는 점도 문제였다. 한 직원은 “낮잠 제도를 썼다는 사람을 한 명도 못 봤다”며 “이런 제도가 시행됐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정부, 지자체, 기업들이 휴식을 장려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IT업체 휴고는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전 직원이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낮잠 자는 시간으로 운영한다. 다른 IT업체 오쿠타는 업무 중 20분간 낮잠 자는 ‘파워 낮잠 제도’를 도입한 뒤 업무상 실수가 현저히 줄어들기도 했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산업화 시대를 거쳐 온 한국 문화의 특성상 휴식을 안 좋게 보는 경향이 많다”며 “성과는 휴식에서 보장된다는 분위기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