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유승민 공천 않을 거면 길 열어주는 게 정도다

입력 2016-03-21 17:27
친박의 ‘유승민 솎아내기’ 방식이 너무 치졸하다. 무허가 건물에 입주한 사람도 이런 식으로 쫓아내진 않는다. 새누리당은 21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유 의원 선거구인 대구 동을 공천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으나 하루 또 연기했다. 도대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22일에도 최종 결론을 낼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진작 공천탈락 방침을 정해놓고 최고위원회의와 공천관리위원회가 유 의원 공천 여부를 서로에게 떠넘기는 핑퐁게임을 되풀이하는 것은 악역을 맡기 싫어서일 게다.

이미 ‘공천학살’을 통해 거의 모든 유승민계 의원들을 탈락시켰는데 그 수장인 유 의원을 공천한다면 논리적 모순이다. 유 의원부터 잘랐어야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취지에도 부합한다. 그럼에도 그러지 못한 것은 명분이 약할 뿐더러 여론의 흐름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진박(眞朴)을 자처한 예비후보들이 박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대구에서 비박 후보들에게 여론조사 경선에서 잇따라 패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눈과 귀를 막은 친박의 오만이 부른 자업자득이다.

이제 여론조사를 통해 대구 동을 후보를 공천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여론조사는 통상 이틀이 필요해 24일 후보등록 시점 전까지 조사를 마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은 방법은 진박인 이재만 전 동구청장을 전략공천하거나 무공천 지역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 친박으로선 이 전 구청장을 전략공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러자니 가뜩이나 성난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격이어서 유 의원의 자진 탈당을 압박하고 있다.

유 의원이 공천 기준에 미달하면 탈락시키면 그만이다. 그런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이한구 공관위원장도 유독 유 의원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우유부단하다. 유 의원 컷오프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모르긴 몰라도 친박은 유 의원의 4·13 총선 불출마를 학수고대할 것이다. 그러나 유 의원의 출마를 막을 방법이 없다면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가려야 옳다. 공천을 주지 않을 요량이면 유 의원 바람대로 내치는 게 순리다. 새누리당이 누구나 다 아는 이 같은 뻔히 보이는 수순을 머뭇거리는 이유는 총선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어떻게든 유 의원이 권력의 희생양으로 비치는 모습은 피하고 싶어서다.

유 의원이 총선에서 생환할 경우 박 대통령의 체면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레임덕이 빨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구 동을 선거는 단순히 국회의원 한 명을 뽑는 차원을 넘어 박 대통령의 국정·정치철학을 중간평가하는 장(場)이 되어버렸다. 행여 유 의원의 출마를 단념시키기 위해 꼼수를 썼다간 걷잡을 수 없는 역풍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떳떳하다면 유권자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