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 인근 버스정류장의 광고판. 출근길 직장인들이 서둘러 계단을 오르고 있다. 남자들은 자연스레 계단을 올라가는데, 정장을 입은 한 여성이 광고판 안에서 튕겨져 넘어진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부딪힌 것이다.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도와주세요”라고 외치자 ‘킥 더 글래스(Kick The Glass)’라는 글자가 나온다. 광고판 밖의 사람들이 힘껏 화면을 걷어차자 눈에 보이지 않던 유리벽이 깨지고, 여성은 비로소 웃으며 계단을 올라간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최근 실제로 설치했던 광고판으로, 유튜브에 ‘유리천장’을 검색하면 나온다.
유리천장이란 여성의 사회참여나 직장 내 승진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유리천장지수는 100점 만점에 25.6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대상국 중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 남녀 임금 격차, 여성 고위직 진출 비율 등을 종합 평가한 결과다.
최근 여성인권 선진국 호주 정부의 초청으로 행정수도 캔버라 등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평일 저녁, 캔버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인공호수에서 서너 살 된 아이들이 부모와 수영을 하고 있었다. 해질 무렵 노을과 겹친 이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그야말로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5시 퇴근하고, 유연근무제가 정착된 호주에서는 직장인이 해지기 전 아이를 픽업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가능하다.
여성이 아이를 낳아 키우며 일도 할 수 있는 나라, 호주에 대한 인식은 캔버라의 한 유치원을 찾았을 때 더 굳건해졌다. 시설과 환경이 좋은 만큼 보육료는 싸지 않았지만 연말에 50%를 환급받을 수 있어 부담이 적다. 이곳에 아이를 맡기는 호주 공무원은 “아이가 세 명인데 유연근무제를 활용해 매주 수요일은 쉬며 아내와 번갈아 육아를 담당한다”고 말했다. 출산휴가로 빈자리는 2년 동안 법으로 보장된다.
임신부터 출산까지 무료, 보육료의 50% 정부 부담, 육아휴직기간 2년간 고용 보장, 유연근무제로 평일 중 하루를 쉴 수 있는 시스템. 그런데도 호주 정부는 북유럽에 비해 고위직 여성 비율이 낮고, 남녀 연봉 차이가 난다며 2012년 양성평등청을 설립했다. 기업 최고경영자를 임금차별 철폐 홍보대사로 임명하고, 매년 기업들이 양성평등 관련 데이터를 의무적으로 공시하도록 했다.
유엔양성평등 홍보대사이기도 한 개리 퀸란 호주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무의식적인 편견을 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회가 너무 오랫동안 남성 중심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남녀 모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굳어진 관습이 많다는 것이다. 맞벌이 가정의 가사 분담이나 직장 내 승진·인사 문제가 그렇다.
‘해리포터’의 여주인공 엠마 왓슨은 유엔 여성친선대사로 활동하며 ‘HeForShe(그녀를 위한 그)’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양성평등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삶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이 함께 풀어야 할 인권 문제라는 것이다.
여성인권 분야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으면서도 유리천장의 심각성을 깊게 고민하는 호주를 다녀온 후 새삼 고민에 빠진다. 아직도 여직원에게 결혼을 이유로 퇴사를 종용하는 회사가 있는 대한민국. 남성과 여성이 인간으로서 평등하고 자연스럽게 공존해갈 수 있는 방안은 어디 있을까. 마침 경력단절 여성과 청년 일자리 확대 방안이 다음 달 발표된다. 정부가 어떤 제도적 해법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한승주 산업부 부장대우 sjhan@kmib.co.kr
[뉴스룸에서-한승주] 킥 더 글래스
입력 2016-03-20 1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