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규영] 동독의 서독 사회교란 책략

입력 2016-03-18 17:40

북한이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감행한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 3일 대북한 제재 조치를 목표로 제2270호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경험에 비추어볼 때 북한은 계속해서 예측하기 어려운 추가 도발을 감행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대남 정책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행태를 구사했다. 특히 7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남한보다 더 이상 우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남한 스스로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는 사회질서 교란 책략을 채택했다. 분단 독일 시절 동독이 서독 체제를 전복시키려고 했던 사회교란 책략을 살펴보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해보고자 한다.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동서독 간 화해와 협력을 앞세운 긴장완화 시기가 본격화되었다. 서독의 ‘실용주의적 동방정책’과 동독의 ‘현실주의적 서방정책’이 상호 조응한 결과였다. 양측 간 기본조약이 체결되고 이산가족 상봉과 상호 방문, 교통·통신 협정, 경제협력과 공동사업, 재정 지원과 문화 교류 등 외면적으로 질적 변화가 나타났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동독은 ‘독일 내 사회주의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완수하고자 서독 체제를 교란시키려는 슈타지(국가보안부) 비밀요원용 공작 지침서(약 4000쪽)를 발행했다. 동독에 ‘평화공존’조차 오직 공산화를 위한 전술적 수단에 불과했다.

이 공작 지침서는 사회 교란을 달성하고자 서독의 상황을 평화, 긴장, 대결·위기, 전쟁상황 등 네 가지로 구분해 투쟁 지침을 달리 수립했다. 슈타지의 공격 목표 역시 서독의 주요 인사, 국가단체 또는 기관, 핵심적 교통·통신 인프라 및 경제·군사 시설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정리됐다. 교란 공작을 수행할 때에도 신분 노출은 엄격히 금지됐다. 절대 동독과의 연관성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오로지 서독 사회 내부의 자체 모순에 의해 발생한 것처럼 위장하도록 했다.

슈타지는 1989년 체제 붕괴 직전까지 서독을 교란시키고자 약 4000명의 전문요원을 양성해 각종 테러와 납치 행위 등을 자행했다. ‘자유유럽라디오(RFE)’ 방송시설에 폭탄테러를 가하거나 서독 망명 축구선수, 슈타지 직원 또는 탈(脫)동독 인사를 납치하거나 살해하려 했다. 밀케 슈타지 장관은 ‘적국(敵國)에 가서 적을 사살하고, 만약 체포되더라도 법정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명예를 위해 수행한 일이다’라고 강변하도록 지시했다.

이와 병행해 동독은 바르샤바조약기구와 연합해 서베를린 점령을 위한 모의 훈련을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실시했다. 연합군 병력 1만2000명과 서베를린 기동경찰대 6000여명에 맞서 3만2000명의 병력으로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시가전에 대비하고자 동베를린의 레닌군사훈련소 내에 서베를린의 주요 모형 시설을 만들어 훈련시키면서 점령 후 적대세력 제거 및 주요 시설 장악 등 공산화 계획을 수립했다. 서독 내 ‘혁명적 상황’을 대비해 활동했던 암약 세력은 고정간첩을 비롯해 3만명에 달했다.

과거의 뒤안길에 묻혔지만 동독의 공산체제는 서독은 물론 서방세계에 심각한 위협 요인이었다. 공산화를 위한 전략·전술은 시대 변화와 상관없이 유사하다. 동독의 서독 체제 전복을 위한 교란 책동 사례를 연구하고, 북한의 테러·납치 등 각종 침투 가능성에 사전 대비하면서 철저한 안보태세를 확립하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규영 서강대 국제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