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0대 남성 A씨는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 몸에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아무도 없는 새벽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운 뒤 벌어진 일이었다. 여자친구는 현장에서 숨졌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다시 사귀자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여자친구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해서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했다. 순간의 분노가 참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분노범죄’가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분노범죄가 그 사회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지표인 만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진단했다.
오창호 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17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현대인의 분노,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심포지엄에서 “‘묻지마 폭행’ ‘층간소음 살인’ ‘보복운전’ 등 이른바 ‘분노범죄’는 사회적 관점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변호사협회가 공동 주최한 이번 심포지엄은 분노범죄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마련됐다. 의사협회 이헌정 사회건강분과위원장은 “현대인이 겪는 분노조절 장애 문제는 위험 수준까지 올라갔다. 분노를 건강하게 승화하는 방법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대부분 분노범죄는 감정·충동적 이유에서 발생한다. 경찰청 범죄통계에 따르면 2014년 전체 폭력범죄 39만1000여건 가운데 ‘우발적 동기’가 42.5%나 됐다. 우발적 동기에 의한 폭력범죄는 2011년 이후 꾸준히 40% 이상을 유지해 왔다.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 등 정신병적 증세도 분노범죄의 한 원인이다. 안용민 서울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분노·충동장애 등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범죄를 저지르는 건 아니다”면서도 “충동적이든 계획적이든 분노를 해소하는 행동이 범죄로 이어지기 전에 정신과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분노범죄의 가장 큰 부작용은 모두가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한다는 것이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권일용 경감은 “분노범죄는 사회 구성원들이 ‘위험한 사회’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처벌 수위를 높이는 방안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표시했다. 김동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분노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며 “이를 성찰하고 올바르게 다스리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한변협 오은경 사무차장은 “분노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강하게 처벌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현재 우리 법은 ‘지극히 심각한 수준의 정신병’에 이르는 경우에 한해 그 범죄행위를 처벌하지 않는다. ‘심신상실’에 따른 면책 사유에 해당하는 것이다. 오 사무차장은 “분노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 대해선 형사처벌 외에도 치료 프로그램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며 “분노가 범죄로 폭발하기 전에 분쟁조정 제도 등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폭력 범죄 42%가 ‘우발적’… 당신도 잠재적 피해자
입력 2016-03-17 2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