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들 계좌확보 압박에… ‘묻지마 ISA’ 속출

입력 2016-03-17 21:04

회사원 김모(32)씨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가 출시된 지난 14일 신탁형 ISA 계좌를 만들었다. A은행에 다니는 친구는 신분증 사본만 보내주면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김씨는 친구에게 신분증 사본과 가입에 필요한 1만원을 함께 보냈다. ISA에 어떤 금융상품을 담아 투자할 것인지, 투자 성향은 어떤지 등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ISA 계좌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김씨 경우처럼 은행 직원들이 지인이나 친척을 통해 신분증 사본만 받아 ISA에 가입시키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은행들이 출시한 신탁형 ISA에 가입하려면 고객이 직접 창구를 방문해 원천징수영수증이나 소득금액증명원 등 소득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고객 신분증 사본만 있으면 고객 명의의 위임장을 활용해 세무서에서 은행 직원들이 일괄적으로 서류를 처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이 위임장에 고객의 자필 서명을 직접 받지 않고 대필해 소득증명 서류를 받은 뒤 계좌를 유치하는 방식으로 계좌 늘리기 경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신탁형 상품은 고객의 직접 지시가 필요해 고객이 대면창구에서만 자필 서명을 통해 가입토록 한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A은행의 경우 3월 내로 2주 동안 1인당 30명의 목표치를 채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출시 첫날 ISA 가입 인원과 액수는 거의 은행원으로 충당된 것으로 안다”며 “서민의 자산증식 취지와는 동떨어져 실적 올리기에 급급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17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4∼16일 ISA 누적 가입자는 총 51만5423명, 가입금액은 2159억원으로 집계됐지만 첫날에 비해 실적은 하향세다. 가입 첫날인 14일에는 가입자 32만2990명, 가입금액 1095억원이었지만 16일에는 가입자 8만1000명, 가입금액 528억원으로 뚝 떨어졌다. 특히 3일간 은행에서 가입한 이들이 49만324명으로 전체의 95%를 차지했지만 은행의 가입금액 비중은 약 1427억원으로 66%에 그쳤다. 1인당 가입금액을 업권별로 보면 은행은 29만원, 증권사는 293만원으로 나타났다. ISA에 연간 2000만원 한도로 5년간 1억원까지 가입할 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은행원들은 정부가 새 금융상품을 내놓을 때마다 실적 경쟁을 해야 하는 피로감을 호소한다. 지난해 9월 출시된 청년희망펀드 때도 은행원들은 개인별 할당 목표를 받아 논란이 일었다. 다른 시중은행 직원은 “ISA가 순익 200만원(서민형은 250만원 한도)까지 비과세라고는 하지만 수수료 등을 감안하면 매력이 떨어지는데 실적이 걸려 있으니 주변에 가입을 권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지난해 가입이 끝난 재형저축(근로자 재산형성저축)처럼 ISA도 인기가 시들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ISA 출시 3개월 후인 6월 중순을 목표로 ISA 상품별 수익률 및 판매·운용보수 공시 시스템을 준비 중이지만 신탁형은 수익률 공시가 어려울 전망이다. 금투협 관계자는 “신탁은 고객이 일일이 편입 상품을 지시하는 특성상 금융기관에는 재량이 없어 수익률 공시 대상이 아니다”며 “모델 포트폴리오가 제시되는 일임형만 수익률이 공시되고, 신탁형은 상품 판매·운용보수 정도만 공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상진 고세욱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