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밥 한 끼-김언호] 사무치게 그리운 “오나아!”

입력 2016-03-17 19:57
김언호 대표(도서출판 한길사)
우리 형제들은 해마다 8월 초순이면 고향 집에 모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신잔치를 해드리기 위해서였다. 저 낙동강변 하남 들판에서 농사로 살림을 다시 일으켜 세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일곱 형제를 키우고 공부시켜 외지로 내보냈다. 그러곤 우리들이 자라고 뛰놀던 큰 집을 외롭게 지키고 계셨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신이 일주일 사이라 한꺼번에 치렀다. 방학이라 아이들도 함께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생신을 차린다기보다 동네 어른들을 모시는 잔칫날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와 함께 밤새 음식을 준비했고 마을 어른들을 초대하기 위해 일일이 방문해서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농사를 천직으로 삼았다. 우리를 학교에 보내는 부지런한 농부였다. 아버지는 농사 잘 짓는다고 ‘독농가’ 표창까지 받았다. 언제나 논과 밭에서 일하는 분이었다. 어머니는 음식 잘하는 여장부였다. 키는 작았지만, 살림을 추슬러나가는 의지와 실천력이 대단했다. 일꾼을 다루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늘 푸짐한 먹을거리로 일꾼을 대접했다.

잔칫날 우리는 하루 내내 상 차리고, 마을 어른들을 맞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신잔치는 1970년대부터 30여년은 진행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 해 한 번쯤은 그렇게 이웃을 초청해 잔치라도 해야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잘 자라서 세상에 나가 나름대로 일하기에 그것이 고맙고, 그 고마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이란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잔치하는 것이다. 이웃과 잔치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아버지와 어머니는 터득하고 계셨을 것이다.

우리 마을은 신라 화랑 사다함이 가야를 친 전쟁터였다고 역사책에 나와 있다. 한때 150가구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고향 찾아가는 우리 형제들의 발길은 늘 즐거웠고 이 방 저 방에서 음식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한여름 날의 풍경은 풍요로웠다. 절약이 몸에 밴 분들이었지만 그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푸짐하게 준비하고 함께 나누면서 즐기는 것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엔 굶는 이웃도 있었다. 한두 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이웃들이 어린 나에게도 걱정이었다. 그땐 거지도 많았다. 전쟁을 치른 나라는 참으로 고단하게 살아야 했다. 그 거지들에게도 할머니와 어머니는 늘 소박하게나마 대접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생신잔치는 어쩜 우리 마을의 마지막 잔치 같은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가면서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잔치하는 것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젠 부모가 계시지 않으니 잔치도 할 수 없다.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던 잔치가 까마득하다. 우리가 뛰놀던 고향의 그 집이지만 부모님이 없어 적막하다.

우리가 고향집에 들어서면 “오나아!” 하시면서 마루에서 마당으로 쫓아내려오시던 아버지 어머니. 손에 일을 놓지 않고 부지런했지만, 늘 이웃에 베풀던 아버지 어머니. 음식솜씨 한껏 발휘하던 어머니 모시고, 아버지 어머니 생신잔치 다시 한 번 하고 싶다. 이웃 어른들 함께 모시고 나눔의 따뜻함을 알게 해준 부모님의 생신잔치를. 천국에 계시는 두 분이 사무치게 그립다.

필자 약력=△전 동아일보 기자△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파주북소리 조직위원장△일산산성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