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소방호스에서 태어나 수익금으로 소방관 돕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가방

입력 2016-03-18 19:57 수정 2016-03-18 20:31
사회적기업 파이어마커스 이규동(오른쪽) 박용학 대표가 지난 14일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의 사무실에서 그간 폐소방호스를 재활용해 만든 가방들을 소개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지난 14일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의 한 오피스텔 빌딩. 26.5㎡(8평) 규모의 사무실에서 파이어마커스 대표 이규동(28)씨와 박용학(28)씨가 깨끗이 세탁한 폐소방호스를 정리하고 있었다. 국내 유일의 소방패션 브랜드 파이어마커스는 폐소방호스를 재활용해 가방, 지갑 등 액세서리를 제작하는 사회적기업이다. 소방서에서 폐호스를 받아 세척하고 재단하는 일 모두가 두 대표의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처음에는 건물 옥상에 고무대야 놓고 빨면서 소방호스 얼룩을 뺐어요. 지금은 가정용 세탁기로 하니 그나마 낫지요. 세탁 과정이 고되긴 해도 같은 무늬가 나오지 않아 개성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박씨)

두 사람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이씨는 CCC 천안지역 대학 대표였고 박씨는 순천향대 CCC 대표였다. 데면데면한 사이던 이들이 뭉친 건 이씨가 박씨에게 디자인 작업을 의뢰하면서부터다. 현재 이씨는 마케팅과 기획을 총괄하고 박씨는 제품 디자인을 맡는다. 믿음이란 공통점을 지닌 두 동갑내기는 ‘소방의 흔적’과 ‘예수의 흔적을 닮자’는 중의적 의미를 담아 브랜드 이름을 ‘파이어마커스’로 지었다. 상품명에 제이콥, 아담 등 성경 인물 이름을 따는 등 제품에 성경적 가치관을 담아 제작하고 있다.

‘폐소방호스를 재활용해 가방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이씨에게서 나왔다. 호서대에서 소방방재학과를 전공한 그는 원래 소방공무원 지망생이었다. 소방관 아버지를 존경하며 어린 시절부터 꿈을 키워온 그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많았다. 매번 위험한 환경에서 낡은 소방장갑을 끼고 일하는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서였다.

“아버지가 시민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웠지만 위급한 상황이 잦으니 걱정이 많았습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사고 현장을 말씀하실 때마다 가슴 아팠고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대우가 열악한 것을 보고 소방관의 헌신을 응원하는 기업을 세우리라 마음먹게 됐습니다.”(이씨)

이씨는 대학 4학년 때 창업 동아리에서 활동한 경험을 살려 CCC ‘비즈니스 창업경진대회’에 출전하는 등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나갔다. 졸업 이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사업에 최종 선정된 201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박 대표와 힘을 합친 것도 이즈음이다. ‘소방공무원 준비나 하라’며 창업을 반대하던 아버지도 이씨가 사업에 박차를 가하자 폐소방호스를 구해다 주며 묵묵히 응원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사업 초기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만든 가방 ‘아담 마커스’를 출시했지만 6개월간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나마 팔린 가방도 불량이 많아 고객 불만 전화를 여러 번 받아야 했다. 수익은커녕 이씨와 박씨가 아르바이트를 해야 회사 운영이 가능했다.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이씨는 매일같이 눈물을 쏟으며 기도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죠. 직원에게 밥 한 끼조차 못 사줬으니까요. 부모님도 그만두라고 했고요.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죠. 그야말로 연단의 시간이었어요.”(이씨)

소득은 없었지만 소방관에게 구조용 특수장갑을 지원하는 일은 계속 했다. 조금이나마 소방관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일이 오히려 회사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소방관의 노후한 소방장갑을 바꿔주는 착한기업’으로 여러 언론에 소개된 것이다.

세간의 화제를 모은 뒤부터 회사 경영에도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크라우드 펀딩에 성공해 사업자금 1300여만원을 모금했고 정기 매출도 늘었다. 얼마 전부터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모바일 주문생산플랫폼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등 다양한 시도에 나섰다. 지난해 11월에는 소방패션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해 서울 동작소방서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앞으로의 목표는 소비자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담 없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소방패션용품’을 만드는 것이다. 고객들이 파이어마커스 제품을 사용하며 시나브로 소방관을 응원하는 문화에 젖어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장갑 기부도 기부지만 앞으로 소방관을 응원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저희 목표예요. 현재 소방관 1명이 시민 1300명의 안전을 지키고 있어요. 시민 1300명이 1명의 소방관을 응원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정착되도록 돕는 패션 브랜드로 성장하고 싶습니다.”(박씨)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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