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의 한국인 간부가 2000년대 초 독일에 있는 벤츠 연구소에 갔을 때 목격했던 일이라며 들려준 얘기다. 연구소 안에는 조잡한 지도를 장착한 자율주행차가 연구원을 태우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독일인 연구원은 당시 “이 자율주행기술은 언젠가 상용화될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0여년이 지난 요즘 자율주행차는 자동차와 인간생활을 바꿀 미래 대표선수로 각광받고 있다.
1967년 설립된 현대차는 일본차, 미국차, 독일차를 수없이 뜯어보며 기술력을 키웠다. 현대차는 한 해 800만대의 자동차를 판매하는 글로벌 5위의 자동차업체다. 세계 5위권의 자동차기업 중 2차 세계대전에서 군수품을 만들지 않았던 기업은 현대차가 유일하다. 하이브리드 자동차의 원조인 일본 도요타가 TF팀을 만들어 현대차의 하이브리드 전용차인 ‘아이오닉’을 분석한다는 것은 시사점이 크다.
현대차는 가장 성공한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발 빠른 추격자)였다. 삼성전자, 포스코 등 우리나라 주력 기업들도 모두 성공한 패스트 팔로어였다. 양질의 노동력과 국가의 지원을 받는 자본 집중,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30∼40년 만에 일본을 따라잡았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자리 잡았다. 외국 브랜드 평가기관에 따르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애플과 구글에 이은 전 세계 3위다. 포스코의 경쟁력은 여전히 세계 정상급이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의 위기를 말한다. 지난 몇 년간 주력 산업들의 발전이 정체됐다는 경고음이 끊이지 않았고,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 주자)가 돼야 한다는 논의도 많았다. 논의는 진전되지 않았다. 퍼스트 무버는 너무 위험했다. 자동차 업계의 경우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은 전기차, 자율주행차, 수소차 등 미래 차 연구에 10년 이상의 시간과 자원을 쏟아부었다. 일본은 5대 자동차 업체들이 똘똘 뭉쳐 수소차 개발에 주력해 왔고, 자율주행차와 전기차는 독일과 미국 업체들이 앞서가는 중이다. 현대차는 수소차도 만들고 전기차도 만들고 자율주행차도 만들지만, 아직 1위 기술은 없다. 현대차는 아직 패스트 팔로어다.
문제는 앞으로다. 지금까지는 추격자에게도 기회가 있었지만, 인공지능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면 패스트 팔로어라는 말 자체가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이미 이러한 경향은 현실화되고 있다. 올해 초 부산에서 벌어진 드론쇼를 취재했다. 전 세계적인 드론 열풍에 정부도 드론 산업 육성 로드맵을 발표했던 차였다. 현장에서 만난 국내 드론업체 사람들의 목소리는 달랐다. 그들은 “드론 산업은 게임이 끝난 시장”이라고 진단했다. 무인정찰기 등 군수용 드론은 이스라엘과 미국 업체들이 독과점을 형성했고, 항공촬영용 드론 등 우리가 흔히 보는 민간용 드론은 중국 DJI가 장악한 상태라는 것이다.
“열심히 추격하면 격차가 좁혀지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선두주자들은 더 빨리 날아가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 세계의 하늘을 장악한 소수의 드론 업체들은 지금도 전 세계 하늘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고, 시장 장악으로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돈을 더 많이 연구에 투입하고 있다. 패스트 팔로어가 따라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미래 기술들이 현실화될수록, 소수의 독점 기업만 살아남고 나머지 기업은 하청업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진다.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에 맞설 ‘베타고(BetaGo)’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우리에게는 이세돌 9단이 있었다.
남도영 산업부 차장 dynam@kmib.co.kr
[세상만사-남도영] 위기에 처한 ‘패스트 팔로어’
입력 2016-03-17 1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