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정치의 축도(縮圖)다. 바둑 기사가 그러하듯 정치인은 수읽기에 능해야 하고 정당의 실력은 세력 싸움에서 드러난다. 궁극의 승리를 위해 수졸을 쳐내는 읍참마속의 상황을 감내하면서 냉혹한 승부를 간단없이 이어가야 한다는 점도 정치와 바둑의 유사점이다.
총선을 다룬 정치 기사에는 바둑 용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묘수 꼼수 승부수 포석 같은 반상 위의 용어는 정치판 상황을 전할 때 유용한 수사다. 바둑이 가로세로 각각 19줄이 직교해 만든 361점을 놓고 벌이는 게임이라면, 총선은 국회의석 300석의 주인을 가리는 총성 없는 전쟁이다.
이처럼 바둑이 정치와 비슷해서인지 정가에는 바둑 고수가 많다. 프로필 ‘취미’나 ‘특기’란에 ‘바둑’을 내세운 정치인도 부지기수다. 정쟁이 벌어질 때마다 이들 머릿속엔 돌과 돌이 치열하게 맞붙는 반상의 모습이 떠오를 수도 있을 듯하다.
정치인의 바둑 사랑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지난 9일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등 여야 지도부가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을 찾았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을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대국장에는 박원순 서울시장도 합류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는 대국이 생중계된 종로구 한 극장에서 ‘세기의 대결’을 관람했다.
정가를 주름잡는 이들 정치인 중 김 대표를 제외하면 다들 바둑에 일가견이 있는 애기가다. 우선 원 원내대표는 국회 바둑 동호회 ‘국회 기우회’ 회장으로 아마 5단의 실력을 자랑한다.
원 원내대표는 체스와 비교해 바둑을 예찬했다. 그는 “체스는 왕을 죽여야만 이기는 ‘제로섬 게임’이지만 바둑엔 상생과 공존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세돌 9단의 도전은 인간이 달에 첫걸음을 내디뎠던 것과 비슷한 인류의 위대한 도전이었다”고 평가했다.
박 시장과 안 대표의 ‘바둑 사랑’도 유명하다. 박 시장은 2014년 서울 세종대로에서 열린 ‘차 없는 거리’ 행사에서 프로기사와 시민들의 다면기(多面棋·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게임) 대결에 동참해 이창호 9단, 이세돌 9단 등과 대국도 펼쳤다. 박 시장의 기력은 아마 5급으로 알려져 있다.
안 대표의 바둑 이력은 누구보다 특이하다. 그가 반상을 처음 마주한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대학생 안철수’는 바둑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입문서를 시작으로 바둑 서적 50여권을 독파했다.
그는 책으로 바둑을 익힌 뒤 아마 10급과 첫 대국을 펼쳤는데, 9점을 놓고도 100집 이상 내주며 처참히 패했다. 하지만 이후 실력은 일취월장해 1년 만에 기력을 아마 2단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안 대표는 지난 9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나 바둑이나 마찬가지”라며 ‘이세돌·알파고 대국’ 관전평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이세돌 9단이 3연패 뒤 기어코 승리를 거둔 게 충격이었다”면서 “어려울 때 얼마나 잘 견디는지가 ‘마지막 결과’를 만든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야권 대선 주자 중 한 명인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 역시 소문난 바둑 마니아다. 평소 술자리를 즐기지 않는 그는 특별한 약속이 없을 땐 유명 기사들 기보를 탐독하며 시간을 보낸다.
문 전 대표는 2012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와 바둑의 닮은 점을 묻는 질문에 바둑계 격언인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를 언급했다. 남을 공격하기 전에 자신부터 살피라는 의미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남의 대마 잡을 궁리만 하면 결국 자기 대마가 잡히고 마는 것처럼 정치를 할 때도 항상 자신의 스탠스를 탄탄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계 바둑 최고수는?
정치인 중 역대 바둑 최고수를 꼽으라면 3선(14·15·16대)을 지낸 새천년민주당 장재식 전 의원을 들 수 있다. 아마 7단의 기력을 가진 그는 과거 덤 5집을 받는 조건으로 이창호 9단과 대국을 벌여 2승 1무 1패를 기록했다. 프로 기사와 견줘도 될 만큼 실력이 대단했던 셈이다.
정치인의 ‘바둑 사랑’을 거론할 때 반드시 언급할 인물은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다. 그는 5·16 ‘거사’를 앞두고 서울 청계천 기원에서 처음 바둑을 배웠다. JP는 해외여행을 갈 때도 비행기 안에서 바둑을 뒀고 기자들과 얘기할 때도 바둑 용어를 자주 썼다. 총리로 재임하던 1999년에는 대통령배(杯) 바둑대회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호를 딴 운정(雲庭)배 바둑대회를 열었다.
3김(金) 중 그를 제외한 고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바둑을 좋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바둑을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취미로 여겼다. YS는 바둑 두느라 회의에 늦는 의원에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다. DJ 역시 혈세로 먹고사는 정치인이 바둑으로 소일하는 걸 탐탁잖게 여겼다.
그렇다면 현재 국회의원 중 바둑 고수는 누구일까.
최고 단수를 자랑하는 인물은 아마 7단 새누리당 김기선 의원이다. 선친의 어깨너머로 바둑을 배운 그는 고교 시절 프로 기사를 꿈꾼 ‘바둑 꿈나무’였다. 2013년 중국 정치인들을 초청해 열린 친선전에서는 대륙의 고수들을 ‘격파’하고 ‘한·중 국회 바둑왕’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김 의원 외에도 새누리당 이인제 정우택 의원, 더민주 이해찬 유인태 최규성 의원 등이 상당한 바둑 실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오는 20대 국회부터 정계의 바둑사(史)는 큰 변화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 바둑의 전설’ 조훈현 9단이 새누리당에 입당해 20대 총선 비례대표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가 당선되면 현재 고수를 자처하는 의원 중 어느 누구도 기력 자랑을 하기 힘들 듯하다.
조 9단은 지난 10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에 참석해 입당 소식을 알리면서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 진 게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바둑계를 위해 마지막으로 일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 입당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는 “한 달 전쯤 원 원내대표가 (정치 입문을) 제안해 그때부터 장고(長考)했다”며 “정치는 바둑으로 치면 36급 입문 수준이다. 차차 배워나가겠다”고 했다.
바둑팬들은 조 9단이 배지를 달았을 때, 어떤 묘수를 찾아내 어떻게 야당과 수 싸움을 벌일지 기대하고 있다.
박지훈 김경택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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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3-19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