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세기의 격돌이 시작될 때 언론은 기계가 바둑에서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을지 의심하였다. 이 9단의 낙승을 예상했지만 알파고가 세 판을 내리 승리하자 분위기는 급속히 냉각되고, 오히려 인간이 기계의 엄청난 능력에 도전하는 모양새가 됐다. 네 번째 대국에서 마침내 승리한 후 언론은 일제히 이세돌 9단에게 찬사를 보내며 인간의 위업(?)을 찬양했다.
지금까지 인간 문명의 진화는 일종의 ‘신 따라하기’가 아니었을까? 즉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점차 신처럼 되고자 노력해 왔다. 인간은 지식의 확장을 통해 ‘전지’하려 하고, 기계장치를 통해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서 ‘전능’하길 원한다. 정보통신 혁명을 통해서는 세계를 연결해 ‘무소부재’하려 하고, 의학과 생명공학을 통해 ‘영원불멸’하길 꿈꾼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여 “이 땅을 다스리게 하자”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신의 형상이란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 인간만의 특별한 능력이다. 이제 인간은 신의 그 창조력을 모방한다. 인간성이라 할 수 있는 지성과 직관, 그리고 감정을 기계에 불어넣어 자신의 분신을 창조하고 그 피조물로 이 땅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특별한 피조물에 감탄하지만, 이런 성취감은 이제 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에게 반역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마치 인간이 태초에 그러했듯 말이다. 알파고가 승리하자 인터넷상에서는 알파고를 숭배하는 유사종교적인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단순한 지능을 넘어 수많은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인간보다 더 윤리적이며 영적일 수 있으리란 상상을 하기도 한다. 영화 ‘로봇소리’의 인공지능이 생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나 ‘인류멸망 보고서’에서 사찰을 위해 제작된 로봇이 자체학습을 통해 해탈하여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친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인공지능의 진화가 어디까지 이를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인공지능과 첨단과학의 발전을 통해 태초에 좌절된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계의 인간화 못지않게 자주 회자되는 개념은 바로 ‘인간의 기계화’이다. 즉 과학의 도움을 통해 인간은 기계와 결합하면서 생물학적 개념을 초월한 ‘트랜스휴먼’ 또는 ‘포스트휴먼’으로 급격한 진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오늘날 인간은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하기보다 기획되고 변화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 서브젝트(subject)가 프로젝트(project)가 되었다. 이것을 흔히 동력혁명, 정보화혁명을 넘어선 ‘이식혁명’이라고 한다. 의학의 발전과 함께 신체는 기계와 결합하고,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정신은 컴퓨터나 인터넷과 결합한다. 나아가 생명공학을 통해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종으로 진화되길 원한다.
이런 발전을 통해 인간은 정말 더 행복해질까? 첨단과학의 시대에 종교와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우려와 비관으로 문명을 거부하는 이원론적 태도는 지난 역사를 보더라도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빗이 지적한대로 ‘하이테크’ 시대에 사람들은 ‘하이터치’를 열망한다. 인공지능의 첨단 과학은 오히려 인간 스스로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더 깊은 각성을 불러오며 종교적인 담론과 관심을 증폭시킨다.
첨단과학의 시대에 종교는 인문학과 더불어 과학기술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과학적 호기심과 발전이 무분별한 곳으로 질주하지 않도록 그리스도인들은 열린 마음으로 과학과 대화하며 최선의 방향을 제안하고 기술을 이끌어 가야 한다. 기술이 이 세상을 보존하고 다스려야할 인간에게 좋은 파트너가 되고, 인간이 창조주의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있도록.
윤영훈 <빅퍼즐문화연구소장>
[윤영훈의 컬처 토크] 우리가 우리 형상을 따라 창조한 것을 보라
입력 2016-03-18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