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빈(28)씨의 붓이 도미니카공화국 빈민촌의 낡은 건물 외벽을 훑고 지나자 벽엔 ‘천사’가 그려졌다. 빈민촌 아이들은 그림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그렇게 흥분할 일인가.’ 의아해하는 박씨를 보고 현지 선교사가 말했다.
“이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림’이란 걸 봤어요. 이곳엔 그림책이나 교과서가 없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이라며 감탄하고 있네요.”
2012년 1월 도미니카공화국 단기선교에서 경험한 일이다. 지난 10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공원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씨가 당시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그때 결심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그림 그리는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겠다고 말이죠.”
◇문신(文身)과 배신=어린시절 그는 이면지 수십 장을 하루 만에 그림으로 채우곤 했다.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한 박씨는 홍대 거리에서 타투이스트(문신을 새겨주는 사람)로 활동하며 다른 사람의 몸에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 방값은 물론 타투숍까지 차려주겠다는 후원자가 있을 정도로 업계에서 알아줬다. 그래도 모태신앙이었던 그의 마음속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었다.
“함께 타투이스트를 하기로 했던 친구가 신실한 크리스천인 아버지의 만류로 일을 못하게 됐어요. 다음 날 한 친구는 ‘일주일째 너에 대한 악몽을 꾸고 있다’고 했고, 그 다음 날엔 대구에서 다니던 교회의 사모님이 ‘너를 심하게 다그치는 꿈을 꿨다’며 걱정했어요. 이런 일이 잇달아 발생하니 하나님이 다그치시는 것 같아 두려웠어요.”
박씨가 고민을 털어놓자 어머니는 말씀 한 구절을 읽어주셨다.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레 19:28)
바로 타투를 그만뒀다. 몇 달 뒤 호주로 떠났다. 체스터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도미니카공화국 단기선교도 이때 간 것이다.
대학 졸업 후 4명의 친구들과 구두 사업에 뛰어들었다. 박씨는 회사 로고와 홈페이지, 브로슈어 등을 제작했다. 1년여 고생 끝에 대기업 투자까지 유치했지만 며칠 뒤 회사대표였던 친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겪은 절망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고, 3개월간 교회 십자가 밑에서 통곡했다. “교회 외벽에 그림을 그려보는 건 어떻겠니.” 한 장로의 제안에 다시 붓을 들었다. 벽에 붓을 대는 순간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했던 결심이 떠올랐다. ‘하나님이 주신 그림 그리는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겠다.’ 잊고 산 지 3년 만이었다.
◇벽과 통로=지난해 7월부터 몽골, 전북 전주, 경북 의성, 경기도 안산, 전북 진안을 돌며 벽화를 그렸다. 예수님 얼굴, 기도하는 가족, 찬양하는 아이들…. 그의 그림 속엔 ‘복음’이 담겨 있었다. 지난 1월엔 한 달 동안 볼리비아에서 그림을 그렸다. 해발 4000m 넘는 고지대라 숨이 막힐 때마다 산소마스크를 썼고, 정해진 기간에 완성하기 위해 비 오는 날에도 우산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회의감에 빠질 때도 있었다. 30대 초반 젊은 목사의 부탁을 받고 의성 구세군교회에 그림을 그릴 때는 ‘아무도 보지 않는 벽에 그림을 그려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쯤 뒤 목사로부터 이런 내용의 문자가 왔다.
‘아무도 이 벽을 쳐다봐주지 않았는데 효빈 형제가 그림을 그려준 뒤 사람들이 이 벽을 쳐다보게 됐어요. 교인뿐만 아니라 이제는 우연히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도 벽 앞에서 사진을 찍어요. 고맙습니다.’ 교인들이 박씨가 그린 그림 앞에서 찍은 사진도 첨부돼 있었다.
“세상엔 참 많은 벽이 있어요. 벽은 공간과 공간을 가로막기 위해 세워진 것이죠. 벽에 맞닥뜨리면 우린 피해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제가 그림을 그린 벽은 하나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통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너무 좋고, 감사했습니다. 제가 벽화 그리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미션&피플] 잘 나가던 타투이스트서 회심한 ‘벽화 작가’ 박효빈씨
입력 2016-03-16 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