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조선시대 초상화는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라는 관념 아래 치밀하게 그리는 사실정신의 정수로 꼽힌다. 이태호(64·사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의 저서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절판)는 이런 주장을 폈던 책이다. 부지런한 학자로 소문난 그가 새 자료 발굴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살짝 뒤엎었다. 개정증보판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 후기 초상화'(마로니에북스)에서다. '구택규 초상'에서 '초상화 뽀샵(포토샵)'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구택규는 영조 때 요직을 두루 거쳤던 관료다. 어진화가 장경주가 그의 주문을 받아 그린 ‘구택규 반신상’은 피부가 뽀얗다. 그런데 몇 해 후 문인화가 윤위가 장경주의 그림을 모사해 그린 ‘구택규 흉상’에는 오른쪽 빰에 보기 흉한 검버섯이 선명한 게 아닌가. 선비화가는 구택규의 실물을 잠시 바라보고는 얼굴의 점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깐깐했다.
이 교수는 15일 국민일보의 전화통화에서 “조선시대 초상화를 통해 당시 피부병을 연구한 논문이 나올 정도다”면서 “그런데 화원화가의 그림에서 시쳇말로 뽀샵 처리를 한 게 처음 발견됐다. 주문 그림이니 기분 좋게 그려주는 게 좋았을 것이다. 인간의 성정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말했다.
책은 80점의 초상화를 엄선했다. 진경정신(진짜 본 걸 그림)을 바탕으로 제작된 초상화의 사실성 및 아름다움, 카메라 옵스큐라 유입이 미친 영향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증보판에서는 추가로 발굴한 초상화들이 다수 실렸다.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이 심의를 입고 복건을 쓴 모습을 그린 ‘유복(儒服) 초상화’도 찾아냈다. 왕의 사위라 관직을 할 수 없자 당시 학자들이 숭상했던 주자를 연상시키는 ‘주자 패션’으로 묘안을 냈다는 설명을 달았다.
고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는 때론 탐정이 돼야 한다. ‘윤두서 자화상’은 배경도, 의복도 과감히 생략하고 눈빛 형형한 얼굴과 덥수룩한 수염으로만 가득 채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1937년 찍은 이 자화상의 사진이 1996년 발견됐는데 옷깃 선이 선명하게 있었다. 미술계는 발칵 뒤집혔다. 표구 기술자의 실수로 지워졌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 교수가 비밀을 풀어냈다. 의복의 선은 종이 뒷면에 따로 그려서 앞으로 비치게 하는 ‘배선법(背善法)’을 썼고 당시 사진을 찍으면서 뒷면에도 조명을 비추면서 선명하게 나왔다는 것이다. 이 교수 주장은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적외선 촬영을 통해 사실로 입증됐다.
그는 조선시대의 풍경화(진경산수), 풍속화, 초상화 등에 깃든 사실정신에 천착해왔다. 민중미술 이론가이기도 했던 그는 “1980년대라는 뜨거운 시대를 거치며 사실정신에 더 애착을 갖게 됐다. 서양이 아닌 우리 고전에서 배울 수 있는 형식이 없을까 고민하게 됐고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룬 사실정신이 답이었다”고 말했다.
내년 2월 정년을 앞뒀는데 앞으로 화가가 되고 싶단다. 이미 월간미술에 격월로 ‘이태호 교수의 진경산수 톺아보기’를 연재하며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진경산수 속 실제 현장을 조사하며 이렇듯 아름다운 땅에서 나고 자랐구나하는 감동이 컸어요. 옛 화가들처럼 내 산천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났지요.”
학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홍대 서양화과 출신이다. 1977년 국전에서 입선을 했으니 전혀 엉뚱한 꿈도 아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 조선 화원화가도 초상화 ‘뽀샵’ 했다
입력 2016-03-17 20:09 수정 2016-03-17 2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