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많은 맹학교에 브라스밴드가 있다. 시각장애인 중에는 절대음감을 가진 이들도 많고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 브라스밴드는 교내외 행사에서 많은 호응을 얻기 때문에 활동도 활발하다.
우리 한빛맹학교에도 1980년대부터 브라스밴드가 있었다. 브라스밴드 연주는 취미활동이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면 활동도 그만뒀다.
내가 막 교장이 됐을 때 한 시각장애인 중학생 제자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저는 트럼펫 부는 게 너무 좋아요. 시각장애인이지만 안마하며 살고 싶지 않고 죽을 때까지 트럼펫을 불고 싶어요.”
음악만 하고 살려면 우선 음대에 진학해야 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장애인들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는 게 쉽지 않다. 특히 음악 분야는 더 그렇다. 시각장애인 학생을 받아주지 않는 학교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공부 잘하고 연주를 잘해도 지휘자를 볼 수 없다면 협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친구의 꿈을 키워주고 싶었다. 그래서 음대에 진학시키고 싶어 시각장애인이 갈 만한 음대를 찾아봤으나 뽑는 인원도 적고 들어가서 배우기도 힘들었다. 시각장애인이 들어갈 수 있는 전공과는 안마를 더 전문적으로 배우는 곳뿐이었다.
그래서 아예 우리 학교에 음악 전문과정을 만들기로 했다. 나는 교육청을 찾아가 일본처럼 시각장애인들이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전문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결과 2004년 특수학교로서는 전국 최초이자 유일하게 2년제 음악전공과 과정 설립 인가를 받았다.
교원을 배치하고 커리큘럼을 만들고 교육공간을 확보했다. 학생 중에는 40, 50대도 있었다. 음악에 관심과 열정이 있었지만 갈 만한 대학이 없어 음악을 포기했던 이들이었다. 우리 음악전공과는 빨리 자리를 잡았다.
졸업생 중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한 학생도 있었다. 서울시립대를 비롯해 서울 시내 유수의 음대에 편입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을 졸업해도 갈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 전공과에서 음악을 공부한다고 해서 지휘자를 볼 수 없는 것이 달라지진 않았다. 지휘자를 볼 수 없다면 일반 오케스트라에 가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한빛예술단이다. 단원들에게는 최저임금 이상의 급여를 주기로 했다. 전문대 과정도 만들고 오케스트라도 만들었는데 넘어야 할 산이 또 있었다.
제자는 계속 배출됐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은 한계가 있었다. 시각장애인 40∼50명에게 꾸준히 최저임금 이상을 준다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 수익활동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나는 더 바빠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찾아 나섰다. 일본도 방문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악전공과를 운영했다.
일본은 음악교육 과정은 잘돼 있는데 음악을 전공하려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취업할 수 없으므로 학생들이 외면했다. 결국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들이 일할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는 점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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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3-17 1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