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이세돌 세기의 대결이 몰고 온 두 가지] ‘5000년 인간 바둑’ 뒤집어졌다

입력 2016-03-16 21:40

이세돌(33) 9단이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에 1승4패로 패한 뒤 바둑의 패러다임에도 큰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알파고가 기존 정석을 다소 무시한 행마로 이 9단을 눌렀기 때문이다.

이 9단도 15일 최종 5번기 대국을 마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알파고의 의외의 수를 인정하면서 “기존 정석과 다른 몇 가지 수는 깊이 연구해봐야겠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는 “그동안 악수라고 안둔 수가 악수가 아닐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12일 3국에서 패하고 자신의 패배가 바둑의 정석에 변화를 가져올 정도로 혁명적인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이세돌이 진 것이지 바둑이 진 것이 아니다”라고 강변한 것과 비교해 한 발 물러선 형국이다.

이번 대국의 영어 해설자이자 서양 기사로서는 유일하게 프로 9단에 오른 마이클 레드먼드 9단은 “바둑은 새로운 이론을 발견해가면서 지금까지 발전돼 왔다”며 “알파고로 인해 새로운 바둑 이론이 나올 수 있고, 이를 통해 바둑의 3차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알파고는 이 9단과의 대결을 통해 기존 정석을 벗어난 ‘이상한 수’를 여러 차례 보여줬다. 해설자들은 초반에는 “아마추어 같은 수”라며 알파고의 실수라고 지적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수는 알파고가 승리하는 데 보탬이 되는 수가 됐다.

하지만 알파고의 이 같은 정석을 벗어난 수가 항상 묘수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4번째 대국에서 이 9단이 ‘신의 한수’로 인정받았던 백 87로 파고들자 알파고는 당황한 듯 의외의 수를 잇달아 뒀다. 알파고가 항상 이길 확률이 가장 높은 곳에 착점한다는 ‘신화’가 거짓임이 드러난 셈이다. 1202대의 중앙처리장치(CPU)로 연결된 알파고가 엄청난 연산능력에도 불구하고 실수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알파고 개발사인 딥마인드 데미스 하사비스 CEO도 알파고가 ‘실수했다’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국을 참관한 모든 프로기사들은 알파고의 실력을 온전히 인정하는 분위기다. 알파고는 대국장에서 ‘알사범’으로 불렸고 시상식에서 한국기원이 수여하는 명예 9단증을 받았다. 알파고의 선전으로 기존 인간의 상식에서 정석이라고 여겼던 것들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모습이다. 이 9단의 스승인 권갑용 8단은 “알파고는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나 류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며 “앞으로 가르치는 룰이나 규칙도 좀 바꿔야겠다”고 말했다.

바둑 전문가들은 “지금까지 바둑은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다”며 “알파고와의 경기를 통해 패러다임 자체가 바뀔 수 있다”고 전망했다. 송태곤 9단은 “인간이 지난 5000년간 바둑을 둬오면서 당연시했던 행마나 모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며 “이번 대국으로 바둑의 기술 발전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프로 바둑계는 이번 세기의 대국이 한동안 침체됐던 바둑 연구에 불을 댕기는 촉매제가 되길 바라고 있다. 그간 큰 상금이 걸린 국내외 대회가 많아지면서 바둑 연구보다는 승패에 집착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다는 지적이 많았다.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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