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울미술관 건립자 안병광 회장 “아내와의 ‘황소’ 그림 구입 약속, 30여년 만에 지켰죠”

입력 2016-03-15 21:09
안병광 서울미술관 회장이 15일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출품된 대표작 ‘황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83년 이 작품에 반해 인쇄물을 7000원에 샀던 안 회장은 2010년 경매를 통해 원화를 35억6000만원에 구입했다. 구성찬 기자
‘통영 앞바다’ 서울미술관 제공
‘자화상’ 서울미술관 제공
1983년 태풍 포레스트가 몰려왔을 때다. 폭우를 피하기 위해 액자가게의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쇼윈도를 통해 그림 하나가 보였다. 이중섭의 ‘황소’였다. 금세라도 달려들 듯한 역동적인 기운에 빠져들었다. 누구의 그림인줄도 모르고 가게주인에게 물었다. “얼마요?” 가게주인이 “이건 인쇄물인데 1만원”이라고 했다. 3000원을 깎아 7000원을 주고 샀다.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서울미술관 건립자인 안병광(59) 유니온약품그룹 회장의 그림사랑은 36년 전 그렇게 시작됐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16일∼5월 29일)을 앞두고 15일 미술관에서 만난 그는 ‘황소’ 작품을 보며 지난 추억을 떠올렸다. “그림과 인쇄물도 구별할줄 몰랐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약속했지요. ‘언젠가 당신에게 이 그림의 원작을 꼭 사 주겠소’라고.”

그림에 꽂힌 그는 작품을 사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처음 구입한 작품은 이남호 작가의 ‘도석화’였다. “당시 월급이 23만7000원이었는데 그림값이 20만원이었어요. 사실 영업사원으로 꼴찌를 면치 못했던 제게 용기를 심어주셨던 상사의 권유 때문에 샀지요. 한 달치 월급을 그림 한 점과 맞바꾼 셈인데 집안에 걸어놓으니까 그 가치가 20만원어치는 족히 되더군요.”

이후 유니온약품을 창립한 안 회장은 돈을 버는 대로 그림을 샀다. 특히 이중섭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여의도 시민아파트에 살 때 윗집에 구상 시인이 살고 있었어요.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눴는데 1950년대 절친이었다는 이중섭 화백의 삶에 대해 말씀하셨죠. 불우한 천재화가 이중섭의 애틋한 생애와 가족사랑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어요.”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길 떠나는 가족’, 거침없는 붓질이 잘 드러나는 ‘통영 앞바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영향을 받은 ‘환희’,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아이들과 비둘기’, 종이에 그린 ‘활 쏘는 남자’ 등을 구입했다. 그러나 정작 ‘황소’는 시장에 나오지 않다가 2010년 서울옥션에 출품됐지만 워낙 고가여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절호의 기회이긴 한데 너무 비싸서 ‘내가 주인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경매 당일 미국으로 출장을 갔어요. 전화도 꺼놓고 있다가 켰는데 이옥경 가나갤러리 대표(현재 서울옥션 부회장)에게서 전화가 온 거예요. 아직 낙찰이 안 됐는데 안 사실 거냐고. ‘이것도 운명이구나’ 여기고 35억6000만원에 낙찰 받았죠. 아내와의 약속을 30여년 만에 지킨 셈이죠.”

‘이중섭은 죽었다’라는 타이틀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안 회장이 구입한 이중섭 작품 17점과 외부에서 빌려온 1점이 출품됐다. ‘통영 앞바다’와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은 2006년 이중섭 위작 파문으로 가격이 곤두박질할 때 작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팔았던 작품이다. 개인 소장품인 ‘통영 앞바다’는 빌려오고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인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은 모조품을 걸었다.

전시는 그림뿐 아니라 이중섭의 생애를 시기별로 보여주는 자료도 선보인다. 그의 묘지가 있는 ‘서울, 망우리 공원묘지’, 통영에서의 활동을 담은 ‘통영, 항남3길 25번지’, 6·25전쟁 후 전시를 했던 ‘부산, 루네쌍수 다방’, 배고픈 피란생활지였던 ‘제주, 서귀포읍’ 등 코너를 마련했다. 안 회장은 “이중섭은 죽었지만 그의 예술혼을 되살리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과 한 언론사 공동 주최로 덕수궁미술관에서도 6월 이중섭 전이 열릴 예정이다. 안 회장은 “평생 모은 이중섭의 대표작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전시를 여는데 외부에서 ‘왜 김을 빼느냐’ ‘전시를 안 하는 게 좋겠다’는 등의 말을 많이 하더라”면서 “그래서 다른 소장자의 작품을 빌려오기가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미술관 뒤쪽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채였던 석파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이 있다. 그림도 보고 산책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건립비용만 500억원 가까이 들었다. 미술관 한 달 운영에도 평균 2억원이 든다. 안 회장은 “미쳤다는 얘기도 많이 한다. 사업은 유한하지만 문화는 무한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쉼과 여유를 얻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이광형 문화전문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