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정태] 이세돌 신드롬

입력 2016-03-15 17:54

일본과 중국에 밀려 푸대접받던 한국바둑의 위상이 높아진 건 1989년이다. 대만이 창설한 최초의 세계바둑대회인 응씨배에서 조훈현이 우승했기 때문이다. 조훈현은 결승 5번기에서 중국 녜웨이핑에 1승2패로 끌려가다 2연승 하는 역전극을 펼쳤다. 그해 9월 6일 귀국한 조훈현은 김포공항에서 종로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금의환향했다.

조훈현은 조남철 김인에 이어 한국바둑의 1인자 자리를 물려받은 ‘바둑황제’다. 이 아성은 제자 이창호에 의해 무너진다. 이창호는 92년 최연소(만 16세) 세계챔피언이 된 이래 십수년간 한국바둑을 세계 최강으로 이끌었다.

1인자 계보를 이은 게 이세돌이다. 현재 한국바둑 랭킹은 2위지만 2002년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뒤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는 다섯 살 때 바둑알을 잡았다. 아마 5단의 아버지가 가르쳤다. 12세인 95년 입단한 이세돌은 프로기사가 된 계기를 이렇게 말한다. “조훈현 국수님이 89년도에 우승하잖아요. 카퍼레이드가 너무 멋있는 거예요. 그거 보고서 일곱 살 때부터 프로기사가 되겠단 생각으로 공부한 거예요.”(14일 MBC TV ‘다큐스페셜’)

전투에 강한 이세돌은 난전의 명수로 자유분방한 바둑을 선보인다. 그래서 인공지능 알파고의 상대로 선택됐겠다. 이번 세기의 대결로 ‘이세돌 신드롬’이 일고 있다. 당초 기계의 도전으로 여겼으나 3연패 충격 이후 인간의 도전으로 성격이 바뀌고 4국에서 처음 승리하자 찬사가 잇따른 것이다. 인류의 자존심을 지켰고,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도전정신을 보여줬다고. 영화 ‘터미네이터’의 인류 저항군 지도자 ‘존 코너’에 빗대 ‘돌 코너’라는 별명도 생겼다.

비록 5번기 승자는 알파고가 됐지만 초유의 이벤트가 바둑 열풍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은 바둑계에 고무적이다. 조훈현의 카퍼레이드 당시 이상으로 바둑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으니. ‘세계 랭킹 1위’ 커제를 보유한 중국에 다소 밀리는 상황에서 한국바둑이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