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택시!”
지난달 23일 밤 12시 무렵 서울 종로구 청계천 인근 도로. 회사원 이모(30)씨가 비틀거리며 차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밀린 업무 때문에 전날 잠을 거의 못잔 그는 소주 1병을 마신 뒤 강북구의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고 있었다.
비틀대던 이씨 앞에 은색 그랜저 승용차가 멈춰 섰다. 택시 마크나 미터기도 없는데 만취한 이씨는 택시인 줄 알고 올라탔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이 차는 1시간여 만에 강북구 주택가에 그를 내려줬다.
다음날 눈을 뜬 이씨는 바지 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살폈다. 신용카드 2개가 사라졌다. 휴대전화에 인출 내역이 찍혀 있었다. 현금서비스와 카드대출을 합쳐 총 545만원이 빠져나간 채였다. 그랜저를 몰던 노모(50)씨의 짓이었다. 만취해 정신이 없는 이씨에게 “다 왔으니 요금 주세요” 하면서 신용카드 받아내고, “비밀번호도 알려주셔야죠” 해서 비밀번호까지 알아내 현금을 빼간 것이다.
노씨에겐 공범이 있었다. 25년 전 서울 이태원 술집에서 같이 호객행위를 하던 김모(48)씨였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나이도 들어 호객만으론 생계가 어려워지자 묘안을 냈다. 만취한 손님들이 술값 계산할 때 “돈 찾아오라”며 쉽게 카드 맡기고 비밀번호까지 불러주던 경험에서 착안했다. 둘은 ‘가짜 택시’를 운영하며 한 사람이 신용카드를 확보하면 다른 사람이 현금을 인출하는 식으로 역할을 나눴다.
2012년 1월부터 지난달까지 4년 넘게 같은 수법으로 서울 마포와 종로, 경기도 김포 등지에서 취객 27명에게 모두 1억7720여만원을 빼돌렸다. 피해자 중엔 다음날 술이 깬 뒤 카드가 없어진 걸 몰랐던 이도 많았다고 한다. 신고한 이들도 분실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수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서울 마포경찰서는 노씨와 김씨를 상습절도 혐의로 구속했다고 14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은 25년 지기인데 지난달 사건은 노씨 단독범행이었다. 김씨는 ‘노씨가 약속을 저버리고 혼자 범행해 수익을 독차지했다’며 분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만취 승객 노린 ‘가짜 택시’… “카드 비밀번호 알려 주셔야죠” 4년간 1억7000여만원 인출
입력 2016-03-14 2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