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절망에 떤 사흘 끝내 극단 선택… 한 20代 여성을 죽음으로 내몬 데이트폭력 전말

입력 2016-03-13 19:09

남자친구가 목을 졸랐다. 주먹은 그녀의 얼굴 옆을 지나 등지고 선 가게 셔터에 ‘쾅, 쾅’ 꽂혔다. 간신히 벗어나 집에 가는데 남자친구가 달려오더니 이번엔 밀쳐 쓰러뜨렸다. 그는 다시 목을 조르며 물었다. “왜 헤어지자는 거야?”

이런 일을 당한 A씨(23)는 귀가해 잠을 자다 갑자기 경기(驚氣)를 일으키며 벌떡 일어났다. 이튿날 밤에도 그랬다. 회사에 출근했지만 안절부절못했고, 자신의 증세가 이상해 정신과 진료를 예약했다. 그러곤 꼭 사흘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이 보도된 다음날(지난 10일), A씨 아버지(56)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할 얘기가 있다”고 했다. 11일 약속장소에 A씨의 가족들과 친구가 함께 나왔다. “이렇게 될 줄 상상도 못했죠. 밝은 아이였는데….” 아버지는 공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뒤늦게 열어본 딸의 휴대전화에는 남자친구 B씨(25)와의 메신저 대화가 저장돼 있었다. 이들이 전한 ‘데이트폭력’ 사건의 전말, 그것이 젊은 여성을 자살로 몰고 간 과정은 이랬다.

사소한 말다툼서 시작된 폭행

지난 5일 밤 A씨와 B씨는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자정이 지나자 B씨는 “데려다주겠다”며 A씨 집 근처까지 함께 왔다. B씨는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주겠다고 했다. 뭘 먹겠는지 묻는 그에게 A씨가 “알아서 골라 달라”고 하자 말다툼이 벌어졌다. B씨는 “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아느냐” “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느냐” 하며 화를 냈다. 그런 남자친구에게 A씨는 헤어지자고 했다.

사소한 말다툼은 폭행으로 이어졌다. 편의점 밖으로 쫓아 나온 B씨는 A씨를 인근 가게의 닫힌 셔터 쪽으로 밀쳤다. 이어 수차례 손으로 목을 졸랐다. A씨 얼굴 뒤의 셔터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고, A씨의 양 손목을 잡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주변 상가에서 이를 본 아주머니가 나와 B씨를 말렸다. 그 틈에 A씨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100m쯤 갔는데 뒤에서 B씨가 달려왔다. 그는 A씨의 허리를 잡아 길가 화단으로 밀쳐 쓰러뜨렸다. 다시 목을 조르며 “왜 헤어지자는 거냐”고 물었다. A씨는 “손대지 말라”고 뿌리친 뒤 집에 들어갔다.

잠시 후(6일 새벽 2시쯤) B씨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가 A씨 휴대전화에 도착했다. B씨는 ‘미안하다’ ‘갑자기 네가 나한테 등 돌린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다. A씨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을 때부터 정 떨어졌다’고 답했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남자친구는 ‘나도 못났지만 너도 반성할 건 해야 한다’ ‘앞으로 잘 지내라’고 문자를 보냈다.

A씨는 언니(28)와 같은 방을 썼다. 언니는 A씨가 화장을 지운 뒤 자리에 누웠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경기를 일으켰다고 했다.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더니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잠들더라는 것이다. 언니는 6일 아침 동생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A씨는 남자친구와의 일을 털어놨다. 자매는 밖으로 나가 어떻게 대처할지 얘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그날 밤에도 A씨는 경기를 일으켰다.

데이트폭력이 주는 수치심·절망감

A씨는 7일 출근한 뒤 언니와 상의한 대로 인터넷을 통해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언니에게 전화해 “그 일이 자꾸 떠올라 괴로워서 회사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호소했다. 퇴근 후 언니와 함께 서울 관악경찰서에 가서 피해자 조서를 작성했다. 이튿날에는 친구를 만나 털어놨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얘기를 나눴다.

9일 오전 출근한다며 집을 나선 A씨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택시 타고 회사 앞까지 갔는데 “도저히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겠다. 일찍 집에 가겠다”고 했다. 언니는 “내 신용카드로 맛있는 것 사먹고 들어가라”고 했지만 카드가 결제됐다는 문자는 날아오지 않았다. 낮 12시30분부터 수차례 건 전화를 동생은 받지 않았다. 오후 5시45분쯤 집에 들어온 어머니는 욕실에서 숨져 있는 A씨를 발견했다. A씨는 정신병원에 상담을 문의해 다음날 오전 진료예약을 해둔 상태였다. 이날 B씨는 경찰에서 조사받으며 폭행 사실을 시인했다.

정신과 전문종합병원인 서울시은평병원 남민 원장은 “A씨가 극심한 수치심과 함께 이 일이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이 문제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우리라는 절망감을 느꼈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연인 간 폭력은 권위적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에서의 폭력이기에 더 큰 문제를 남긴다”며 “폭력은 높은 수위의 위험신호여서 한 번이라도 발생하면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희정 기자 simci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