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평양의 오마니’ 조선의 별이 되다

입력 2016-03-14 18:13
1926년 평양맹학교 졸업생들이 만들어준 하얀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로제타 셔우드 홀(앞줄 가운데)이 회갑잔치를 마친 뒤 제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사진은 로제타를 소개한 소책자(1934년). 하희정 박사 제공

1926년 로제타는 1년 늦춘 회갑잔치를 조선에서 맞았다. 의학공부를 마치고 결핵전문의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아들 셔우드 홀 부부의 귀국에 맞추어 조선의 딸들이 준비한 잔치였다. 주인공이 된 로제타는 평양맹학교 졸업생들이 마련해준 하얀 비단 한복을 입었다. 그가 베풀어준 사랑을 일일이 기억하며 축하하는 하객들에게 로제타는 마지막 소망을 털어놓았다. “내가 여기서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는데 여러분이 협력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조선에 여자의학전문학교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로제타는 합리적이고 철두철미한 성격대로, 이듬해 인도와 중국, 일본에 세워진 여자의학전문학교 8곳을 견학했다. 그리고 1년 후 그의 소망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1928년 9월 개소한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그 열매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땅이었지만 로제타는 조선의 여성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마지막 꿈인 여자의학교를 세우는 일까지 해냈다. 여성의료인 양성은 조선 땅을 밟은 순간부터 그가 안고 씨름하며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오랜 과제였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도전은 의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인들의 협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처음에 학교경영은 전적으로 로제타가 책임지기로 했다. 강의는 뜻을 함께 하는 12명의 의사들이 재능기부 형태로 협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의 경기침체로 선교를 후원해왔던 외부지원금이 감소하며 경영난에 부딪쳤다. 영구귀국을 2년 앞둔 1932년, 급기야 로제타는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며 애타는 마음으로 조선인들의 협력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지금 조선 사람의 힘으로 자본금을 세워 경영해줄만한 재력가가 나타나기만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재력 있는 조선부인이 여기에 귀를 기울여 준다면, 죽은 후에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제 나는 늙은 몸입니다.” 이듬해에는 일본에 볼모잡혀 있던 영(친)왕에게까지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영구귀국이 한해 앞당겨진 상황에서 로제타는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와 동경의학전문학교를 각각 졸업하고 의사가 되어 돌아온 길정희·김탁원 부부에게 의학강습소 경영을 부탁했다. 김탁원은 동경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른 민족의식이 강한 인물이었다. 재능기부로 강의하는 의사들도 30여명으로 늘어 걱정을 덜어주었다. 하지만 로제타가 떠난 후, 기독교 쪽에서 들어오던 후원금이 끊기며 학교는 존폐위기에 몰렸다. 김탁원은 중앙과 보성학교를 운영하는 김성수의 소개로 우석 김병익에게 도움을 청했다. 민족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김병익은 30만원이라는 거금을 기꺼이 마련해주었다. 그 덕분에 로제타가 그토록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져 민족자본으로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될 수 있었다. 해방 후 학교는 서울여자의과대학, 수도의과대학, 김병익의 호를 딴 우석대학을 거쳐 김성수가 설립한 고려대학교로 통합되었다.

로제타가 설립한 다른 병원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처음 청진기를 들었던 정동의 보구여관은 동대문의 볼드윈 진료소와 통합되어 1912년 릴리언 해리스 기념병원이 되었다. 릴리언 해리스는 로제타가 딸을 잃고 신경쇠약증에 걸려 병가를 떠났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해 광혜여원에서 진료했던 후임의사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1902년 발진티푸스에 걸려 평양에서 죽음을 맞았다. 릴리언 해리스 기념병원은 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 이대 목동병원이 되었다. 로제타는 1921년 동대문부인병원 원장이 되어 이화여전에 의예과를 신설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화여전은 1929년 가사과만을 설치하여 그를 오래토록 아쉽게 했다. 어린 딸을 잃고 슬픔 속에 세웠던 평양 광혜여원은 1922년 남편 홀의 희생을 기념하여 세운 기홀병원과 통합되었고, 이후 장로교와 연합하여 운영하는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로제타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이뤄낸 성과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한 사람이 해낸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폭넓었다. 이는 그녀를 끝까지 신뢰하고 기꺼이 협력했던 수많은 동료들과 후원자들의 숨은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로제타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홀로 이룬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지구 반대편에서 조선자매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보내준 고국의 후원자들을 잊지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합하여 선을 이루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말없이 실천한 보이지 않는 손들이었다. 이들의 귀한 손길을 조선인들도 영원히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스물다섯의 꽃다운 청춘에 첫 발을 들여놓은 후 68세까지 반세기에 가까운 43년의 생애를 조선을 위해 살았던 로제타 홀. 그에게 조선은 생의 전부였다. 그는 이방인으로 찾아와 조선의 역사를 새로 썼다. 아니 조선의 역사가 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로 살았지만 종교의 차별을 두지 않고 수십만의 조선인들을 치료했다. 의사였지만 환자의 몸만 치료하지 않았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약한 자를 먼저 돌보는 긍정적 의무감과 성숙한 책임의식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아무도 희생하려 하지 않는 사회에 새로운 미래는 없다. 로제타의 헌신은 ‘평양의 오마니’라고 불릴 만큼 고통 속에 살아가던 수많은 여성들과 어린이들에게 넉넉한 품과 따뜻한 영혼의 안식처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수십만의 조선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켰다 해서 노예를 해방시킨 링컨에 비유하기도 했다. 1933년 미국으로 영구 귀국한 후에도 로제타의 조선사랑은 멈출 줄 몰랐다. 조선의 온돌방이 얼마나 위생적인 것인지 가는 곳마다 이야기했고, 조선여인들이 곱게 바느질한 하얀 한복을 늘 그리워했다. 그는 교회와 학교에서 배운 기독교 정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세상에는 하늘의 뜻을 깨닫고 이를 온전히 신뢰해야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모두가 화려한 꿈을 꾸고 성공을 향해 달려갈 때, 스스로 땅에 묻히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큰 용기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로제타가 선택한 길은 바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하희정 박사<감신대 외래교수·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