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야곱의 우물을 버리고

입력 2016-03-11 17:31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혈통과 문화, 종교적으로 혼합됩니다. 그로 인해 남쪽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불결하게 생각해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거치셨고, 거기서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헤어지고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여인에게 말을 겁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 여인도 묻습니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것을 허무시고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내려와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여인은 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온 가족은 물론이고 가축까지 조상 야곱이 준 우물로 살았는데,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입니까?”

이 여인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의 눈과 관심이 야곱의 우물과 전통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갈증이 생길수록 내가 아는 것, 내가 소유한 것으로 갈증을 해결하려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러시아 작가 고골리의 소설 ‘외투’에는 말단 공무원 아카키가 등장합니다. 그는 서류를 정서(正書)하는 일 외에 할 줄 아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오래된 외투를 버리고 1년 동안 생활비를 모아 멋진 새 외투를 삽니다. 이 외투를 건달들에게 빼앗기고 그는 슬픔과 좌절 속에 숨을 거둡니다. 이후 마을에는 외투를 빼앗아가는 유령이 매일 밤 나타났다고 합니다. 소설에는 가난한 소시민의 애환과 그들에 대한 연민도 나타나지만 보잘 것 없는 외투가 삶의 목표가 돼버린 인간에 대한 조롱도 있습니다.

아카키의 외투나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처럼 우리가 움켜쥐고 삶의 전부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려놓을 때 우리의 갈증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근본적인 갈증은 우리의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나의 소유와 생각, 관습에 몰두하지 말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우리의 관습과 편견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뤘으면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활의 의미입니다.

조준철 수원 영통성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