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오치균(60). 붓과 나이프를 던지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혔다. 캔버스와 손가락이 만나는 원초적 촉각에 본능을 실었던 작가다. 미술시장에서 그는 ‘감나무 작가’로 기억된다. 2007∼2008년 시장이 뜨거웠을 때였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주홍색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두터운 마티에르의 손가락 그림은 토속적 정감을 자아냈고 컬렉터들은 환호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오치균: 뉴욕 1987-2016’전은 이제 그를 ‘감나무 작가’가 아니라 ‘뉴욕의 작가’로 불러달라고 외치는 듯하다. 뉴욕은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가 80년대 후반(1987∼1990) 도전장을 내밀며 유학(브루클린 대학)을 떠났던 곳이다. 1992년∼95년, 2014년∼올 초 등 몇 차례를 더 뉴욕에서 보냈다. 30년 미술인생에서 뉴욕은 그의 또 다른 정체성이다.
작가로서의 성공, 명예와 부의 성취 정도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에 영향을 미칠까. 적어도 오치균의 뉴욕 그림에서는 그랬다. 미래가 불투명했던 유학시절, 지하철 노숙자와 자신이 동일시됐던 불안했던 시선은 화가로서의 명성이 올라가며 이제 뉴욕의 마천루조차 내려다보는 자신감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88올림픽으로 한국이 알려지기 전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동남아 이주 노동자를 보는 시선과 별반 다르지 않았지요.”
개막일인 지난 4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영어는 안 되지요. 옷가게 점원, 세탁소 다림질 등 안 해본 육체노동이 없었어요. 자연스럽게 시선이 지하의 세계로 갔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시커먼 지하철 그림을 가리켰다. 몇 가닥 희미한 선이 있을 뿐 형태조차 분명하지 않다. 그림 속에서 노숙자는 외톨이 마냥 일개 점으로 찍혀 있을 뿐이다. 검은 물감을 손가락에 묻혀 사선을 그으며 어디로 흐를지 모를 미래에 대한 불안을 토해냈다.
인생의 밑바닥을 맛본 심정으로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런데 91년 금호미술관에서 가진 초대전에서 대박이 났다. 이어 92년 뉴욕으로 다시 떠나 3년여 머물며 그린 그림에는 9·11테러로 지금은 사라진 쌍둥이빌딩에서 바라본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등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뉴욕 체류 마지막 3기는 2014년 가을에 시작됐다.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는 그는 “뉴욕은 어떨까. 뉴욕에도 가을이 있었을까” 궁금했다. 도무지 생각이 안나 뉴욕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단다. 놀랍게도 힘든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뉴욕의 단풍나무가 거기 있었다. 우중충 회색 콘크리트 숲으로만 보였던 뉴욕에 햇빛이 비치는 찬란한 가을 풍경은 1층에 연작처럼 전시 중이다. 세려된 유리 빌딩을 배경으로 울긋불긋 단풍이 화려하다.
그렇다면 트레이드마크가 된 감나무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걸까. 두 번째 뉴욕을 갔을 때 연이어 뉴멕시코주 사막지역 산타페를 갔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한국에서 사북의 탄광촌을 찾게 됐다. “산타페의 환한 햇빛을 경험한 직후여서인지 물조차 검은 사북의 검은색에서 초현실적인 느낌이 들었어요. 극과 극의 풍경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갔지요. 사북을 그리면서 시골을 그렸고, 감나무도, 봄꽃도 그리게 됐습니다.”
각기 다른 시선과 정서가 관람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내적 고통의 절규가 손가락 그림의 속성과 맞아떨어지는 뉴욕 초기 ‘검은 회화’에 공감하지 않을까. 4월 8일까지(02-720-5114)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점점 높게 화가의 성공이 시선을 바꿨다… 손가락그림 작가 오치균 개인전
입력 2016-03-21 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