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터전 잃은 후쿠시마·미야기현에도 봄은 오는가… 방사능 수치 낮아졌지만 원상태 100% 회복 못해

입력 2016-03-11 04:02


수치로 봐서는 일본의 방사능 오염은 어느 정도 해소돼가는 모습이다. 후쿠시마 시 당국 등에 따르면 후쿠시마의 방사능 수치는 지난달 기준으로 시간당 0.25∼0.5μ㏜(마이크로시버트) 수준이다. 2011년 사고 직후 17.9μ㏜에 비하면 크게 낮아진 수치다. 하지만 서울이 0.11μ㏜ 수준인 점을 감안하면 원상태를 100% 회복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곳 이재민들이 다수 수용됐다는 시내 가설주택단지로 발길을 옮겼다. 지난해를 기점으로 주민 다수가 원래의 집이나 공용주택으로 거처를 옮겼기에 단지는 한산했지만 드문드문 여전히 거주하는 이재민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아이와 함께 4년 넘게 가설주택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이시즈카 유코(35)씨는 “아직 거주제한지역으로 돼 있는 옛 터전에 다시 집을 짓고 있어서 곧 제한이 풀리면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자신들은 형편이 좀 나은 편이지만 가설주택에 남아있는 이재민 중에는 저렴하게 제공되는 공용주택에 들어갈 여력도 없어 무료인 가설주택에서 버티는 이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아직 제한구역이면 방사능 우려에서 안전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역시나 “적응돼서 괜찮다. 수치가 낮아지고 있다는 발표를 믿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진 직후 피난민은 47만명에 달했다. 지금도 18만명 정도는 여전히 터전을 떠나 피난 상태다. 특히 임시주택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6만명에 달한다. 현지 관계자는 “언론에서는 2021년 정도가 돼야 임시주택 거주자가 전부 다 퇴거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쪽으로 차를 돌려 후쿠시마현과 함께 쓰나미 피해를 직격으로 입은 미야기현 센다이시로 향했다. 도심을 거쳐 센다이시 해안에 위치한 아라하마로 이동했다. 쓰나미가 마을을 휩쓸어가는 장면이 현지 방송을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됐던 비극의 장소다.

바다로 방향을 잡아 20여분 달리자 둔덕 위에 성벽처럼 좌우로 늘어선 센다이 동부도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고 당시 해안에서부터 3㎞ 남짓 자리한 이 도로가 방파제 역할을 한 덕에 쓰나미는 도심까지 검은손을 뻗지 못했고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도로 밑 터널을 지나자 광활한 개활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추수가 끝난 들판 같은 겨울 풍경이었다. 복구공사가 계속되고 있는지 맞은편 차로로 트럭들이 드문드문 스쳐 지나갔다.

개활지에 홀로 우뚝 선 아라하마 소학교에 도착했다. 둘러쳐진 담장에 굳게 닫힌 정문 앞에는 지긋한 연세의 노인이 카메라를 들고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도쿄 인근 사이타마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아마미야 슌이치(71)씨는 이곳 미야기현 태생이라고 했다. 그는 5년 전 고향을 강타한 지진과 쓰나미 소식을 듣자 곧바로 자원봉사에 나섰다. 그간 9차례에 걸쳐 방문해 물자를 나르고 복구작업에 손을 보태면서 동시에 재해 직후부터 현재까지 재건 변천사를 카메라에 담았다고 했다.

허허벌판에 학교만 너무 말끔한 것 아니냐고 묻자 아마미야씨는 “불과 지난달까지만 해도 학교 안은 복구작업에서 나온 잔해를 모아놓는 창고처럼 쓰여 난장판이었다”며 “처음 온 사람들에게 쓰나미가 휩쓸고 간 후의 끔찍한 모습을 설명하는 일이 제일 어렵다”고 토로했다. 지금은 휑해 보일지 몰라도 사고 전 일대는 제법 번화한 주택가였다는 설명에 ‘원래 논밭이 펼쳐진 시골 풍경이었을까’ 했던 지레짐작이 무안해졌다. 차로 10여분 가로질렀던 이 넓은 지역을 쓰나미는 눈 깜짝할 새 삼키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던 거다.

큰 사찰이 있었다고 안내한 곳에서 셔터를 눌러대는 아마미야씨의 등 뒤로 1000개는 됨직한 묘비들이 빼곡히 모여 있는 공동묘지 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 많은 묘비를 돌보던 가족들, 고향도 삶의 터전도 잃은 주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5년, 길었던 겨울을 난 그들의 삶에 봄은 왔을까.

센다이·미나미소마=정건희 기자 moderat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