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 예고하셨는데, 세 번째 예고 직전에 한 부자 청년이 질문합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부활)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가고,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영생’, 곧 부활에 대한 종교적, 신학적 질문에 대해 왜 예수님은 ‘돈’ 문제로 응답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질문,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이 현실의 문제, 특히 돈의 문제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은 사람이 부리는 교환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 6:24, 눅 16:13)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굳이 ‘돈’이라는 일상적 단어를 쓰지 않고 ‘맘몬’이라는 아람어를 쓴 것도 돈이 가지는 신성 때문이었습니다. 더욱이 ‘맘몬’을 하나님과 병렬시킴으로써 예수님은 돈의 권세를 과소평가하지 않았습니다. 돈은 사람의 주인으로 섬김을 받으며,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세입니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돈 걱정 없어 보이는 재벌도, 자발적 금욕과 절제를 실천하는 수도승도 돈으로부터 자유하지 않습니다. 돈으로부터의 자유는 자기기만과 위선으로 위장될 수는 있지만 현실이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서는 돈의 문제를 윤리적 차원에서 다루지 않고 영적인 관계에서 다룹니다. ‘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마 6:21), ‘어느 한편을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해야 한다’(눅 16:13)는 예수님 말씀이나, ‘돈에 대한 사랑이 모든 악의 뿌리이며, 돈에 대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믿음을 잃는다’(딤전 6:10)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돈의 문제가 윤리적 교훈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 곧 하나님과 같은 권세와의 관계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돈을 쓴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돈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돈 때문에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기도 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은 우정과 인륜을 서슴없이 버립니다. 돈은 재판관의 양심과 예언자의 예언도 바꿉니다. 세계의 어디에서나 돈 때문에 약탈과 살인, 구타와 고문, 전쟁, 강제투옥과 굶주림 등이 난무하고 가정이 깨지고 종교적 믿음과 윤리적 이상이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부활에 대한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에 가난, 가난한 사람, 돈 등 현실의 문제와 관계시켜 답을 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종교의 문제는 현실의 문제를 떠나 대답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질문일지라도 대답은 현실에서부터 모색되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의 세력에서 깨어 일어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도 죽음의 세력에서 예수님과 함께 깨어 일어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아직도 죽음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함께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나눔이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윤리적 덕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은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나눌 때 돈 때문에 상처받은 세계는 죽음의 세계에서 부활할 것입니다.
채수일 경동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채수일] 돈과 부활
입력 2016-03-10 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