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 실수하면서도 냉정… 감정없는 기계의 승리

입력 2016-03-09 22:12 수정 2016-03-10 00:18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 특별 대국장에서 열린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의 제1번기 대국이 3시간30분 만에 알파고의 승리로 끝나자 대국장에 있던 알파고 프로그램 관계자들이 악수를 나누며 서로 축하하고 있다(왼쪽 사진). 186수 만에 돌을 던진 이 9단이 기자회견을 하며 “(알파고가) 이렇게 바둑을 둘 줄 몰랐다”며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병주 기자
누가 먼저 둘 것인지 가린 결과 이세돌 9단이 흑을 선택했다. ‘알파고’를 대신해서는 딥마인드 개발자인 대만계 아자 황이 돌을 가렸다. 집흑으로 먼저 돌을 두게 된 이 9단은 최소 8집을 이겨야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중국 룰로 진행되는 이번 대국은 덤이 7집반으로 한국보다 1집 많다.

9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이 9단과 알파고의 역사적인 첫 대결. 먼저 이 9단이 첫수로 우상귀 소목을 선택했다. 1분30초 동안 생각을 거듭한 알파고는 좌상귀 화점에 돌을 놓으며 응수했다. 알파고는 지난 10월 유럽 챔피언 판후이 2단과의 대국에서도 5판 모두 첫수를 화점에 놓았다. 알파고는 첫수 뒤 평균 1∼2분 정도를 소요하며 돌을 놓았다.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하사비스 최고경영자(CEO)는 “알파고는 수읽기가 많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시간을 좀 더 소요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당황한 이세돌과 결정적인 패착 순간

초반 흔들림 없는 알파고의 기력에 전문가들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알파고는 별로 약점을 보이지 않았다. 초반부터 이 9단에게 싸움을 걸었다. 이 9단도 놀라는 빛을 살짝 내비치기도 했다. 1시간이 지나면서 이 9단이 변칙적인 수를 찾고 있었다. 어느 정도 흔들면 상대가 실수할 것을 기대하는 듯했다. 1시간30분을 지나면서 해설을 하던 유창혁 9단은 “알파고가 이 정도일 줄은 놀랍다. 이 9단이 불리하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았다. 이름을 가리고 본다면 누가 알파고이고, 이세돌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접전이었다. 하지만 3시간이 지나면서 알파고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수를 내놨다. 이때쯤 홍민표 9단은 “흑집은 총 70집이 두텁다. 백은 50집에 불과하다”며 이 9단의 우세를 예상했다. 하지만 긴장이 다소 풀린 탓인지 이 9단이 이후 몇 차례 실수를 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끝내기에는 계산에 밝은 알파고가 유리했다.

중반까지 우세하던 판세는 알파고의 결정적인 한 수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판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한 알파고가 이 9단이 강한 세력을 점하고 있던 중앙 우측에 백102수로 뛰어들며 국면을 반전시켰다. 허를 찌르는 한 수에 이 9단도 당황했다. 설상가상 이 9단은 오른쪽 아래에서 실리를 뺏기면서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고 반면 알파고는 최후의 큰 자리인 150을 두면서 승리를 결정지었다. 경기장을 찾은 이세돌의 스승 권갑용 8단 역시 “알파고가 생각보다 너무 잘한다”고 말했다. 집을 세던 해설진이 “알파고가 이긴 것 같다”고 하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결국 실수를 하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은 알파고가 승리한 것이다. 감정이 없는 기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열기 뜨거운 대국 현장, 실황 중계도 경쟁 치열

대국장인 포시즌스 호텔 6층 비공개 대국장에는 이 9단과 알파고의 아바타 아자 황이 앉았다. 이 9단의 이름 밑에는 태극기가, 알파고 이름 밑에는 개발사가 있는 영국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알파고를 관리하는 기술자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했다.

6층에는 30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취재진은 오전 11시40분이 돼서야 입장이 허용됐다. 이 9단과 알파고가 대국을 두는 같은 층에는 외국인 취재진을 위한 영어 해설실과 한국 취재진용 한국어 해설실 두 곳이 마련됐다. 영어 해설실은 일본에서 바둑을 수련한 미국인 마이클 레드먼드와 미국 바둑E 저널의 크리스 갈록 총괄 에디터가 해설을 제공했다.

정치권의 관심도 뜨거웠다. 국회 기유회장인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박영선 더민주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현장을 찾아 이 9단을 응원했다.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도 방문해 인공지능의 능력을 직접 살펴봤다.

국내외 미디어의 중계 경쟁도 치열했다. 구글은 유튜브를 통해 다섯 차례의 전 대국을 중계한다. 국내에서는 KBS2가 1국을 중계했고 SBS와 JTBC3는 2국을 맡게 된다. 바둑TV, 에브리온TV, 아프리카TV 등은 전 일정을 중계한다. 네이버에만 30만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몰렸다.

이번 대결의 수혜자 중 하나가 한국 바둑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동안 컴퓨터 게임에 밀려 젊은이들에게 외면 받던 한국 바둑이 이번 대국으로 세계인의 관심뿐 아니라 집중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외신기자들은 지난 8일 단체로 한국기원을 방문해 이 9단과 인터뷰를 하는 등 한국 바둑에 대해 취재하기도 했다. 최근 드라마 ‘미생’ ‘응답하라 1988’ 등 바둑을 다룬 문화 콘텐츠도 바둑의 인기몰이에 한몫했다. 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바둑 보급이 더욱 확대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국기원은 이날 서울 성동구 기원 사무실에서 프로 바둑기사가 바둑 팬들에게 대국을 해설하는 행사를 가졌다.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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