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후반까지 한 10년, 한국에서도 페미니즘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마다 여성학 강좌가 줄줄이 개설됐고, 남자들도 여성주의 책들을 끼고 다녔다. 당시 페미니즘은 교양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은 어디서도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페미니즘은 한 물 간 얘기 정도로 취급받고 있다. 페미니즘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면 대개 모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다. “너 그거구나? 페미니스트 뭐 그런 거. 맞지?” 이런 말로 똑똑한 여자들의 입을 봉쇄하려는 남자들, “저는 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자신의 얘기를 시작하는 성공한 여자들이 드물지 않다.
최근 서점가에 부는 페미니즘 바람은 그래서 이례적이다. 지난 1월 출간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두 달 만에 1만부가 팔렸다. 앞서 지난해 5월 국내 번역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이상 창비)는 지금까지 1만5000부 이상 판매됐다. ‘남자들은 자꾸…’의 인기는 저자 리베카 솔닛이 만든 ‘맨스플레인’이란 유명한 신조어 때문으로 분석돼 왔다. 그런데 나이지리아 출신의 미국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책 ‘우리는 모두…’가 또 다시 팔려나가는 것을 보고 ‘혹시 페미니즘의 귀환 신호가 아닐까?’ 생각해보는 시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두 책의 주요 구매자는 공히 20∼30대 여성들이다.
출판계가 페미니즘 책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는 것도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현실문화), 2014년 미국에서 출간돼 호평을 받은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가 최근 출간됐다.
창비 교양출판부의 최지수씨는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논의가 되살아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앞으로 페미니즘 관련 출간 종수를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여성학을 전공한 김윤경 사이행성 대표도 “젊은 여성들 중심으로 페미니즘에 다시 주목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지난 20여년간 누적된 세계적 불황과 불평등으로 인해 여성들이 가장 큰 피해를 봤다는 인식이 생겨났고, 남녀평등이 어느 정도 이뤄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여성들이 느끼기 시작했다”고 그 이유를 분석했다.
현재 도서시장의 페미니즘 바람은 미국의 젊은 여성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다. 리베카 솔닛,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나쁜 페미니스트’의 저자 록산 게이가 그렇다. 이들은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아니다. 소설과 에세이, 문화비평 등을 쓰는 작가들인데, 여성주의적 시각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걸로 유명하다. 세련되고 날카로운 문체가 돋보이는 이들의 책은 이전의 전투적 페미니즘과는 결이 다르다. 소수자나 약자, 차이에 대한 감수성, 차별이나 혐오에 대한 분노, 페미니즘의 유효성에 대한 옹호 등으로 새로운 페미니즘을 구축한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동시대 페미니즘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이다. 아이티계 미국인으로 퍼듀대 교수이자 소설가인 록산 게이는 영화, TV 프로그램, 베스트셀러, 팝음악, 정치, 저널리즘 등을 소재로 현대 문화가 여성에게 얼마나 차별적이고 폭력적이며 모욕적인지 고발한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원한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가볍게 넘어가라는 말을 듣는 것이 힘들다. 가볍게 넘어가면 그 망할 것들을 계속 하라고 놔두는 꼴이 되니까.”
록산 게이는 이 책을 통해 남녀평등이 착각에 불과하며 여성의 현실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또 오랫동안 공격을 받아 위축될 대로 위축된 페미니즘을 구조해 내려고 시도한다. 그는 페미니즘에 대한 부당한 편견에 반박하는 동시에 이전의 공격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페미니즘에서 나타난 오류들을 인정한다.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두려움에도 공감한다.
“내가 가끔 손사래를 치며 절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마치 인신공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는 게 록산 게이의 주장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면 말이다. 그녀는 ‘페미니즘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페미니즘이 하나로 고정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여성 각자의 욕망과 취향, 한계 등을 인정하면서, 다소 불완전하고 불철저하지만 좀더 자유로운, 다양한 형태의 페미니즘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했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페미니스트가 되자”는 요청이 이어지고 있다. 2016년 한국 사회가 어떻게 응답할지 궁금하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책과 길] 남녀평등? 그것은 착각! 남성 그늘 벗어나려면 어설픈 페미니스트라도 돼라
입력 2016-03-11 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