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atshirt’를 우리말로 뭐라 해야 할지 꽤 한참을 생각했다. ‘땀 흘릴 때 입는 윗옷’이란 뜻일 텐데…. 깃과 단추가 없으며 품이 헐거워 머리부터 뒤집어쓰면 된다. 소재는 면(綿)이고 안쪽은 보풀이 많아 땀이 나도 들러붙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벌쯤 있을 평범한 옷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네이버 영어사전에 물었다. 클릭에 돌아온 답은 ‘추리닝 상의’.
톰 크리들랜드(25)라는 영국의 젊은 디자이너가 지난해 ‘The 30 Year Sweatshirt’란 브랜드를 만들었다. ‘30년’과 ‘추리닝’의 어색한 조합은 ‘30년 동안 입는 추리닝’이란 뜻이었다. 고객들에게 무상 수선을 약속했다. 입다가 찢어지거나 뜯어지거나 해지면 그의 회사에 택배로 보내면 된다. 박음질부터 새로 손봐주는데 배송비도 무료다. 지금 사면 2046년까지 30년 동안.
목화는 갈증이 많은 식물이다. 티셔츠 하나 분량인 면 1㎏을 얻으려면 물 2만ℓ를 줘야 한다. 병충해에도 약해서 세계 살충제 매출의 4분의 1이 목화농장에서 나오고 있다. 이렇게 환경에 부담을 줘가며 만드는데, 영국 시민단체가 여성 1500명에게 물었더니 옷을 사서 버리기까지 입는 횟수는 고작 7번이었다. 3번 입었으면 ‘낡은’ 옷이란 응답도 33%나 됐다.
‘30년 추리닝’을 만들려고 크리들랜드는 포르투갈 시골마을에 갔다. 1970년대부터 바느질로 살아온 재봉사들의 동네였다. 면은 이탈리아 북부 비엘라에서 유기농 생산품을 확보했다. 빨아도 줄지 않게 실리콘 처리를 하고, 표면이 상하지 말라고 또 특수처리를 했다. 이런 옷감을 갖고 수십년 경력의 재봉사들이 이중 박음질로 추리닝을 만들었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2년마다 바꾸는 건 그래야 하도록 스마트폰을 만들기 때문이다. 만약 교체 주기가 4년이라면 생산업체 수익은 지금의 절반이 된다. 삼성전자는 이를 1년으로 더 줄이려고 ‘갤럭시클럽’ 마케팅을 시작했다. 자라, H&M, 유니클로 같은 패션기업은 신상품 출고 주기를 14일에 맞추고 있다. 2주마다 새 옷을 사게 하려면? 빨리 볼품이 없어져야 하고, 버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싸야 한다.
어떻게 그리 싼지, 세계는 2013년 방글라데시에서 목격했다. 빌딩형 의류공장 라나플라자가 붕괴해 1138명이 죽고 2500명이 다쳤다. 쓰러져가는 건물에서 월급 4만원에 자라와 H&M의 옷을 만들던 이들이다.
이렇게 생산된 스웨트셔츠는 영국에서 10파운드(약 1만7000원) 안팎에 팔린다. 크리들랜드는 30년 추리닝을 55파운드(약 9만4000원)에 내놨다. 자라 옷값을 생각하면 쉽게 손이 안 가겠지만, 한번 사면 쉽게 버리기도 어려운 가격이다.
온라인 판매로 출발한 그는 얼마 전 런던 중심가에 팝업스토어를 냈다. 곧 뉴욕과 LA에 진출한다. ‘30년 티셔츠’와 ‘30년 재킷’도 출시했다. “반팔티를 누가 30년씩 입냐”는 의문에 “면티야말로 무슨 유행이 있나. 내구성은 내가 보증한다”며 강행했다. “재킷 디자인 유행은 어쩔거냐”는 지적에는 “시간을 거스르는 디자인은 분명히 있다”면서 시장의 판단을 기다리는 중이다.
지난주 발표된 세계 부자 순위에서 자라의 아만시오 오르테가 회장이 빌 게이츠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자라는 앞으로도 해마다 11% 이상 성장할 거라고 한다. 크리들랜드가 오르테가처럼 큰돈을 벌지는 못할 것이다. ‘패스트패션’이 대세인 시장에서 ‘30년 시리즈’가 주류로 떠오를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래도 뭔가 큰 흐름에 문제가 있을 때 희망은 늘 비주류에 있는 법. 옷 한 벌 사면서 잠시 다른 세상을 생각해볼 선택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태원준 사회부장 wjtae@kmib.co.kr
[태원준 칼럼] ‘30년 추리닝’
입력 2016-03-09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