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침대는 고얀 놈

입력 2016-03-08 18:05

바깥에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공원, 당구장, 산과 들은 만원이다. 자전거를 타도 체증이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카페를 찾는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의 카우리 테이블에 가보라. 100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의자에 빈자리가 없다. 날씨가 풀리면 거리는 더욱 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외부활동이 지나치게 늘어난다는 것은 집의 기능 상실과 연관이 깊다. 인구가 아니라 공간의 문제라는 것이다. 집 잃은 난민의 삶은 부박하다. 돌이켜 보자. 집에서 초상이나 혼례를 치른 지는 옛날이고, 근래 들어서는 그 많던 집들이가 없어졌다. 신접살림을 차리거나 이사를 해도 초대하는 사람이 드물다. 백일이나 돌잔치는 레스토랑에서 한다. 그러니 친구 간에도 아주 가깝지 않으면 부모를 알지 못한다.

집의 추락이 빚어낸 불행이다. 사람들이 한번 밖으로 돌기 시작하니 집은 점점 기능이 떨어져 재산증식의 수단 혹은 숙박의 장소에 머문다. 요즘 한창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꽃청춘을 즐기고 있는 ‘응팔’ 멤버들을 보라. 25년 전 드라마 속에서 펼쳐 보인 우정은 대부분 집에서 잉태됐다.

그들의 아지트는 최택의 방이었다. 거기에는 사춘기 아이들이 좋아할 몇 가지 요소가 있었다. 먼저 엄마가 없다. 택이로서는 불행한 결손인데도 친구들로서는 잔소리꾼 없는 청정지대로 여겼음 직하다. 다른 친구들의 방에 없는 TV의 존재도 매력이다. 거기서 쌍문동 친구들은 드라마도 보고, 비디오도 보고, 음악도 들었다.

내가 드라마에서 눈여겨본 것은 방의 구조다. 그 방은 침대가 없다. 국제바둑대회 우승의 주인공이라면 럭셔리 베드 하나쯤 들여놓을 경제력이 있는 데도 택이는 늘 바닥에 요를 깔고 잤다. 방석에 앉아 바둑책을 보며 기력을 향상시킨 곳도, 불면증으로 고통의 밤을 지새운 곳도 사각의 온돌방이었다.

그러나 최택의 방은 외부인이 들어오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발휘한다. 무시로 드나드는 동네 친구들은 의자에 앉거나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누워 정담을 나눈다. 다섯 친구가 밤늦게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다가 한 이불 속에서 자기도 한다. 방이 가진 확장성은 친구들의 친밀감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덕선과의 가벼운 키스신도 친구들이 공유하는 방이기에 탈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높은 침대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 모든 풍경이 부자유스럽다. 침대는 주인에게 충직한 도구이다 보니 타인의 접근을 꺼린다. 프라이버시의 은밀성을 강조해 친구나 이웃이 방문해도 난간에 엉덩이를 잠깐 걸칠 수 있을 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구조다. 가족도 예외가 아니다. 그 완강한 거부의 몸짓은 침대라는 사물이 지닌 속성이다.

침대의 횡포는 사람의 관계를 무너뜨린다. 예를 들어 시골에 사는 사촌형님이 왔다고 치자. 옛 추억이 많아 술잔과 함께 정담을 나눈다. 밤이 깊어 간다. 잠잘 시간이다. 아파트는 방이 세 개다. 안방은 부부, 방 하나는 아들, 나머지는 딸 방이다. 어디에 모실 것인가. 안방 침대를 내주기도 민망하고, 아이들 방을 비우기도 마뜩잖다. 거실에 이부자리를 봐야 하나. 종형 부부는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여관으로 간다. 사촌형님도 모시지 못하는 집도 집인가.

침대는 고얀 놈이다. 침대만 없으면 안방을 형님 부부에게 내드리고 우리는 마루에 나와도 된다. 아이들 방도 침대만 없으면 이래저래 융통이 가능하다. 떡하니 방 가운데 퍼지고 앉은 침대가 문제다. 그만큼 공간을 죽이고 있는 셈이니까. 이거야말로 과학의 문제다. 이미 안락의 맛을 알아 추방할 수는 없다 해도 적절한 위치를 잡아줄 혁신의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건축과 디자인의 몫이다. 공간의 개방성과 편리성이 조화를 이뤄야 집이 살아나고, 우리의 삶 또한 난민의 신세를 면할 것이다.

손수호(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