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정외일반’(정치외교학과 1반)은 지난달 15일부터 2박3일 동안 강원도 양양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행사를 가졌다. ‘새내기 새로 배움터’(새터)로 불리는 이 모임에서 낯선 장면이 펼쳐졌다. 첫날 저녁식사가 끝난 뒤 ‘성평등지킴이’로 임명된 재학생 남녀 2명이 7개 방을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렸다. 방마다 신입생 10여명과 재학생 7, 8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런 모임에 의례적으로 등장하는 술병은 없었다.
성평등지킴이들은 서로가 불편할 수 있는 행동,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엔 침묵을 지키던 신입생들이 하나둘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러브샷’을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술을 잘 못 마셔서 마실 수 있는 만큼만 마셨으면 좋겠어요.”
성평등지킴이는 자리를 떴지만 한번 말문이 트이자 여러 얘기들이 오갔다.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언행을 조심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1시간가량 이어진 토론을 끝내고 재학생과 신입생들은 몇 가지 규칙을 스스로 정했다. 2박3일 동안 서로 지켜야 할 ‘성평등 자치규약’을 종이에 옮겨 적고 방에 붙여뒀다. 학생 120여명은 별다른 사고 없이 새터 행사를 마무리했다.
‘OT’로 불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신입생에게 ‘고약한 통과의례’로 변질됐다. 매년 각종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개학을 앞둔 지난달 주요 대학의 OT에서 성희롱 논란이 불거졌다. 연세대의 한 학과 OT에서 술자리 게임이 구설에 올랐다. 부적절하고 과도한 스킨십을 벌칙으로 내려서였다. 건국대의 한 단과대학에선 ‘25금(禁) 몸으로 말해요’ 게임을 하며 성행위 묘사 등을 후배에게 강요하기도 했다. 파장이 커지자 건국대는 지난 2일 OT, 멤버십트레이닝(MT) 전면폐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잇따라 ‘착한 OT’ ‘착한 MT’가 등장하고 있다. 학생 스스로 자정노력을 하기도 하고, 대학에서 자원봉사 등과 연계한 행사를 갖기도 한다. 신입생이 적응할 수 있도록 선배들이 도와주고 친분을 쌓는다는 본래 취지를 살리면서 건전한 모임으로 이끄는 것이다.
성균관대 ‘유생문화기획단’은 지난 6일 조선시대 유생이 성균관에 들어갈 때 선배들과 음식을 나눠먹는 ‘신방례(新榜禮)’를 재현한 신입생 환영회를 가졌다. 호남대는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건전MT’를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짜서 신청하면 학교에서 선정해 지원금을 준다. 식품영양학과는 노인들을 위한 ‘영양만점 도시락 경연대회’를 열고, 전기공학과에선 저소득 가정의 노후한 전기시설을 고쳐주는 식이다.
고려대 정외일반 학생회장을 지냈던 전누리(23·여)씨는 “새터는 대학이라는 공간을 간접적으로 배우는 자리다. 토론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민주적 분위기를 경험하는 것이 앞으로 대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술을 강권하지 않는 분위기는 입반식(신입생에게 정외과를 소개하는 행사), 예비학교(신입생의 수강신청 등을 도와주는 행사) 등 행사에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홍석호 기자 wi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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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3-08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