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레이건(1911∼2004)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낸시 레이건 여사가 6일(현지시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94세.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낸시가 없었더라면 ‘주지사 레이건’도 ‘대통령 레이건’도 없었을 것”이라며 “미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퍼스트레이디가 떠났다”고 평가했다.
낸시는 레이건 전 대통령이 재임하던 1981∼89년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다. 하지만 기존 영부인들과 달리 내조자로만 머물지 않았고 정치·외교적 사안에 대해 남편을 적극적으로 ‘코치’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도 정치적 사건이 인연이 됐다. 1921년 뉴욕 태생인 낸시는 여배우이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대학 졸업 뒤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활약했다. 그런데 1949년 한 언론에 낸시가 ‘좌파 예술인’으로 분류됐고, 당시 미 사회가 온통 공산주의자 색출에 열을 올리던 때여서 큰 위기에 몰렸다. 당시 그 좌파 예술인은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이었지만 낸시가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에 낸시는 배우조합장이던 레이건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면서 첫 만남을 갖게 됐다. 레이건은 당시 배우 제인 와이먼과 1년 전 이혼한 상태였고, 낸시가 배우조합의 이사 자리까지 맡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져 1952년 결혼을 하게 됐다.
레이건의 아내가 된 뒤 낸시는 더욱 보폭을 넓혔다. 그녀는 자신의 배우 일은 접은 채 남편의 출세를 위해 열심히 지역 사회를 누볐다. 낸시는 남편에게 정치를 하도록 계속 조언했다. 1967년 마침내 레이건은 공화당 후보로 나서 캘리포니아 주지사에 당선돼 75년까지 재임했다. 주지사 부인 시절 베트남전 참전군인 돕기 활동을 전개하는 등 대외활동도 열심이었다.
낸시는 레이건 막후에서 여러 건의 중요한 결정도 했다. 레이건이 1976년 당 대선 경선에서 패배하자 남편의 측근들을 해고시켰고, 새 참모진을 꾸려 4년 뒤 남편의 대선 승리를 이끌었다. 낸시는 퍼스트레이디 시절에도 마약근절 캠페인을 전개해 미국인들의 칭송을 받았지만 그녀의 활동은 그런 점잖은 활동에 국한되지 않았다.
특히 NYT에 따르면 1986년 미국 인질을 구하기 위해 적대국 이란에 무기를 판 사건인 ‘이란-콘트라 사건’이 터졌을 때 대통령 사퇴 압력이 거세지자 남편을 마이크 앞에 세워 대국민 사과를 하도록 해 위기를 탈출하게끔 도왔다. 또 야당인 민주당 의원들을 꾸준히 만나 의회에서 남편에 대한 호의적 여론이 조성되도록 힘을 썼고, 미국 내 강경 보수파를 설득해 레이건이 구소련과의 냉전을 청산토록 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NBC방송은 전했다.
그녀는 남편이 2001년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3년 뒤 숨질 때까지 알츠하이머에 대한 경각심을 확산시키는 일에도 기여했다.
그녀의 타계 소식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부부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부부 등이 일제히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손병호 기자
‘대통령 레이건’ 만든 여인, 그의 곁으로 가다… ‘퍼스트레이디’ 낸시 레이건, 향년 94세로 별세
입력 2016-03-07 20: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