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봄 로제타는 또 한 번의 슬픈 이별을 했다.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박에스더는 남녀 통틀어 근대의학을 공부한 조선의 첫 의사였다. 남성도 아닌 여성이 어엿한 의사가 되어 돌아오자,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찾는 여성들이 두 배로 늘었다. 9개월 동안 30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다. 사람들은 같은 조선 사람인 박에스더가 수술하는 장면을 보고는 마냥 신기한 듯 “귀신이 재주를 부린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로제타와 함께 전도부인을 양성하는 여자성경훈련반에서 매일 강의를 하고, 때때로 지방을 순회하며 병원에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해 무료진료에 나서기도 했다.
박에스더의 죽음과 결핵 전문의가 된 셔우드
1900년 박에스더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로제타는 어린 딸을 잃은 상처로 신경쇠약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급기야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증상이 심해져 서울에서 치료를 받다가, 이듬해 여름 요양을 위해 셔우드를 데리고 미국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년간 이어진 로제타의 공백은 고스란히 에스더의 몫이 되었다. 박에스더는 하루 평균 80명이 넘는 환자들을 진료하며 과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의사로 나선 지 9년째 되던 해인 1909년, 관민합동으로 경희궁에서 여자 외국유학생 환국 환영회가 열렸다. 1000여 명의 여성들이 참석한 이날의 주인공은 박에스더, 하란사, 윤정원 세 여성이었다. 하지만 이런 영광스런 자리도 폐색이 짙어가는 박에스더를 구해내지 못했다.
박에스더의 죽음은 로제타뿐 아니라 그를 이모처럼 따랐던 사춘기 소년 셔우드에게도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박에스더는 엄마를 제외하고 셔우드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사건으로 셔우드는 사업가의 꿈을 접고 결핵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는 박에스더의 죽음을 슬픔의 감정으로만 간직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통해 더 크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그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같은 해 6월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렸던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한 후 곧 바로 미국으로 건너간 로제타는 셔우드를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마운트 헐몬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학교는 창립자인 D L 무디가 학생자원운동을 처음 일으킨 곳이었다. 남편 윌리엄 홀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아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윌리엄 홀과 로제타는 셔우드를 낳기 전부터 아들을 낳으면 이곳에서 공부시키자고 약속 했었다. 조선식으로 자란 셔우드에게 미국생활은 낯설기만 했다. 문화도 사고방식도 너무 달라 조선을 늘 그리워했다. 하지만 셔우드는 16년 간 홀로 미국에서 생활하며 의학공부를 마치고, 1926년 약속대로 결핵전문의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외과의사인 부인도 함께 동행했다. 이들 부부는 2년 뒤 해주에 첫 결핵요양원을 세웠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우다
1911년 셔우드를 미국에 두고 홀로 조선으로 돌아온 로제타는 여자의학교 설립에 착수했다. 박에스더 이후로 조선인 여의사가 한 명도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의료인 양성이 시급했다. 그동안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다. 로제타는 1890년 조선에 오자마자 미래를 내다보고 박에스더를 포함, 이화학당 학생 다섯 명을 데리고 첫 여성의료교육을 시작한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첫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1897년 여성의료인 양성을 위한 기회를 한 번 더 만들어내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당시 서울에는 여성의료선교사가 감리교와 장로교에 각각 4명씩 있었다. “1897∼1898년 겨울, 나는 한양에 8명의 여의사가 있음을 알았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몇몇 외국인 의사로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벽이 서로를 갈라놓기 전에 한국 여성들에게 의료교육을 실시할 기회를 붙잡았어야 했다.” 여성의료선교사들이 교파를 넘어 협력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뼈아픈 대목이었다.
감리교와 장로교가 교회연합운동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던 1905년, 로제타는 커틀러와 함께 장로교와 연합해 여자의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다. 동대문에 있던 볼드윈 진료소를 릴리언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새롭게 확장하게 된 것을 기회로 삼았다. 새 병원을 동대문이 아닌 장로교의 세브란스 병원이 있는 남대문으로 옮겨 협력구조를 만든다면 여자의학교는 물론이고, 1903년 보구여관 내에 개설된 간호원 양성학교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12년 기회가 다시 왔다. 릴리언 해리스 기념병원이 현대식 건물로 규모가 확장되어 완성되자, 보구여관을 새 병원으로 통합했다. 그 덕분에 보구여관에 있던 커틀러가 평양 광혜여원으로 파송되었다. 로제타는 그와 함께 1913년 9월 의학강습반을 시작했다. 그 후 학생들을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시키려고 계획했으나 학교 측은 여성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로제타는 포기하지 않고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남녀공학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대신에 청강생으로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1914년 로제타는 세 명의 학생을 청강생으로 들여보내고 광혜여원 전도부인이었던 홍유례를 서울로 보내 이들을 돌보게 했다. 그 열매로 1918년 여의사 3명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된 학교는 1926년부터 여학생들의 청강을 금지시켰다. 이에 분노한 로제타는 직접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세웠다. 1928년 9월 4일 개소한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그의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일궈낸 쾌거였다. 이 학교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와 서울여자의과대학이라는 이름을 거쳐 오늘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희정 박사<감신대 외래교수·교회사>
[여성 의료분야 개척자, 로제타 셔우드 홀] 세상 떠난 박에스더 이을 조선 女의사 양성 나서
입력 2016-03-07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