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話하다] ‘맘초이’로 불리던 나의 누나, 최윤숙 선교사

입력 2016-03-06 19:05 수정 2016-03-06 20:47
지난 1일 필리핀 침례신학대학원 채플실에서 열린 최윤숙 선교사 영결예배. 신학교 제자 등이 최 선교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생전 모습. 최윤태 목사 제공

사랑하는 누나가 지난 28일 필리핀 바기오의 사역지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 현지인들에게 ‘맘초이(Mam Choi)’로 불리던 최윤숙 선교사. 지병으로 쇠약한 몸을 추스르며 죽는 그 순간까지도 복음을 전했다. 향년 62세.

누나는 1954년 5월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서 부산 피란 시절 범일동에서 3남 1년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정주출신이다. 할아버지가 장로 직분으로 교회를 섬겼기에 아버지와 누나 역시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라났다.

어머님은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소천하신 서울중앙성결교회 이만신 목사님이 인천 부평에서 신촌성결교회를 개척하실 때 매우 열심이셨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누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예배 반주자로 봉사하기 시작했는데 한 번도 예배반주를 빠진 적이 없었다. 주일 예배는 물론 부흥회 등 특별 집회 때에도 빠짐없이 봉사했다. 서울예고, 이화여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그러나 누나가 20대 때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할 상태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그런 누나의 독일 유학을 허락했다. 물론 빈손 유학이었다. 누나는 그때 혼사 서는 법을 스스로 배워 나갔던 것 같고 거기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있었음을 고백하곤 했다.

누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큰 삶의 변화는 2012년이다. 누나가 위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다행히 초기이고 수술결과가 좋아 평시와 같이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때 누나는 당신의 목숨을 하나님이 살려 주셨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만을 위해 남은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선교사로 2013년 필리핀 행을 선택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울 희락교회(김재박 목사) 파송 선교사로, 현지 학교 음악교수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했다.

누나의 장례예식은 지난 1일 필리핀 침례신학대학원 채플실에서 거행됐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사람들은 누나가 자주 하던 이 말을 새기며 울었다.

현지 학생들은 “최 선교사님은 기도하는 음악교수였어요” “배우는 학생들 보다 더 많이 연습하는 선생님”이라고 회상했다. 새벽에 홀로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필리핀 신학생들은 기억했다. 누나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참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 밑에 빽빽하게 적어 놓은 기도 내용이 들어 있었다. 가족, 친구, 교회식구, 학교, 학생, 교수, 학장에 이르기까지.

누나는 필리핀을 비롯해 가난한 동남아시아 10개국 학생들이 함께 기숙하며 살아가는 그 교정에서 엄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 미얀마 출신 학생들은 누나를 자신들의 친엄마라고 부르며 따랐다. 학교 주방에서 일하는 글로라는 부인은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는 맘 초이로부터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선물 하나는 다 받았을 겁니다. 그는 정말 나를 비롯해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다해 사랑을 나눈 삶을 살았습니다.”

나의 누나 ‘맘초이’, 필리핀과 아시아형제들 마음에 믿음의 어머니로 남을 것으로 믿는다. 안녕 누나. 샬롬 최윤숙 선교사님.

최윤태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교육원장>

최윤숙 선교사 약력=△서울예고△이화여대 음대 졸업△서울신대 교수△필리핀 침례신대 교수 겸 서울 희락교회 파송 선교사△2016년 2월 28일 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