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양심적인 신앙고백

입력 2016-03-04 17:29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간략한 구원공식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입으로 말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바울은 9∼10절을 통해 ‘입과 마음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구원의 징표로 선언합니다. 입과 마음, 둘 중 하나라도 빠지면 공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 공식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봅니다.

첫째, ‘입으로만 시인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부흥회 단골 메뉴로, 목사님이 말끝마다 ‘아멘 하세요!’ 하며 아멘을 강요합니다. ‘입으로 시인하기만 해도 구원 받는다’는 논리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무당이 귀신 쫓기 위해 주문을 외우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으로만 믿고 구원받으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알기는 아는데 실천이 없는 신앙, 열매 없는 썩은 신앙입니다. 이것들은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마음과 함께 입으로 표현할 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전합니다. 이는 곧 다른 말로 ‘신앙고백’입니다. 구원의 삶을 모든 교인이 소망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의 삶은 때로는 불편하고 위험하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인들에게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예수 믿는다고 사자 밥이 될 위험도 없고 스데반 집사처럼 돌 맞아 죽을 사람도 없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입으로 예수를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마음을 다해서 그 분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살이의 방식을 거부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으로 산다는 세상을 향한 선언이며 실천이기에 이 땅을 살아가기에 아주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편하게, 우울하게만 살아가는 게 성도의 삶일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8절에서 ‘말씀’이 우리의 입과 마음에 가깝다고 설명합니다. 8∼9절을 좀 더 간략히 설명하면 구원에 이르는 마음이란, 말씀을 통해 성령에 사로잡힌 마음이란 뜻입니다. 이는 곧 양심입니다. 성경은 양심을 윤리라는 차원을 넘어 ‘성령이 내주하는 자리’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양심 있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이 가슴팍에 자리 잡아 소명을 일깨우는 그 소리에 집중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소리에 집중하면, 그 양심, 그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주님의 뜻으로 이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심을 가진 신앙인은 절개 있는 선비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원하시는 삶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닙니까. 양심을 가지고 신앙고백의 삶을 사는 것.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양심의 종교이며, 교회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다.” 루터의 말은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바울은 이제 11절에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입과 마음으로 믿는 자, 양심으로 신앙고백의 삶을 사는 사람은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하늘의 선언입니다. 사순절기 동안 신앙고백을 하나님 앞에서 떨리는 양심으로 실천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최주훈 목사(중앙루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