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그린 영화 ‘귀향’의 엔딩크레디트는 남다르다. 7만5000여명의 이름 또는 닉네임이 10여분간 올라간다. 바로 제작비 50%가 넘는 12억여원을 조달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다.
크라우드 펀딩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뻔했다. 최근엔 걸그룹들이 펀딩으로 음반이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폐업 위기였던 고려대 명물 ‘영철버거’도 크라우드 펀딩 덕에 아직 손님을 받고 있다.
성공 사례가 이어지면서 정부도 지난달 17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9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공유경제 활성화를 위해 숙박·차량·크라우드 펀딩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크라우드펀딩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 지난 1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에만 집중하면서 다른 형태의 크라우드 펀딩에서 잡음이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크라우드 펀딩이란=크라우드 펀딩은 신규 프로젝트나 아이템을 가진 사람이 인터넷 중개업자를 통해 다수의 개인으로부터 소액의 집단 투자를 받는 것이다. 수익을 내는 투자형(증권형·대출형·펀드형)과 비투자형(기부형·보상형)이 있다.
정부가 주목한 것은 주식형이다. 미상장 주식 등에 크라우드 펀딩 운영회사 등이 투자자로 투자 권유를 하는 것이다. 미상장 벤처기업을 키우겠다는 정부의 정책과 맞닿아 있다. 크라우드펀딩법도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을 위해 만들어졌다.
대출형은 기업이나 개인이 인터넷을 통해 개인으로부터 융자를 받는 일종의 P2P(개인 간 거래)다. 기부·보상형은 말 그대로 보상 없이 기부하거나 돈 대신 다른 형태의 보상을 받는다. 주로 영화, 출판 등 예술 분야에서 활용하고 있다.
◇증권형 외엔 관심 없는 정부=사업자들은 정부가 증권형에만 신경 쓰면서 다른 유형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개업자들이 주먹구구식으로 펀딩을 운영해 사업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도 했다.
최근 카카오의 스토리 펀딩에서 출판을 위해 펀딩에 나섰던 A씨는 200여만원을 모았지만 받아든 돈은 150여만원이었다. 세금, 결제 수수료 5%에 수익의 10%를 중계 수수료로 뺀 것이다. 계약서엔 창작자가 제공하는 스토리 펀딩의 사업화에 대한 권리를 카카오가 소유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A씨는 “15% 수수료에 사업권까지 갖겠다고 하면 책은 어떻게 출판하라는 것이냐”며 울분을 토했다. 카카오와 달리 아예 수수료를 받지 않거나 모금액에 따라 0∼10% 차등 적용하는 곳도 있다.
대출형은 상황이 더 어렵다. 금융상품거래법 등 법률 규제 때문에 크라우드 펀딩을 운영하려면 ‘대부업자(제2금융상품 거래업)’로 등록해야 해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다.
지난해 입법조사처는 비투자형 크라우드 펀딩이 법으로 관리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면 투자형을 포함한 전체 크라우드 펀딩 시장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업자와 중개업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감시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형에 따라 각자 다른 법률이 적용되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았다.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로 일원화하자는 것이다.
건국대 이영환 기술경영학과 교수는 “증권형은 규제가 너무 많아서, 다른 것들은 없어서 문제”라며 “특히 대출형은 정부가 책임질 것을 무서워해 손을 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지적에 정부 관계자는 “중개업체들의 수수료 등 시장 상황을 좀 더 파악해 보겠다”고 했다.
세종=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크라우드펀딩 편애하는 정부… ‘기부형’엔 무신경 ‘주식형’엔 온 신경
입력 2016-03-04 0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