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논란이 일고 있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그렸다고 주장한 권춘식(69)씨가 3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사실은 내가 그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고서화 복원작업을 하는 권씨는 1999년 검찰의 미술품 위작 수사과정에서 ‘미인도’를 자신이 위조했다고 밝힌 후 지난해 10월 천 화백 별세 이후에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기존 주장을 번복함으로써 ‘미인도’ 위작 시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권씨는 “당시 수사과정에서 검찰이 ‘미인도’ 복사본을 보여주며 확인을 요청했을 때 감형 받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으로 우물쭈물했다”며 “1978년 위작 의뢰자에게 3점을 그려준 적이 있는데, ‘미인도’와 착각해서 말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손자들이 커가면서 17년 동안 내 자신을 속이고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해온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모든 사실을 털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을 그린 ‘미인도’는 1979년 10·26사태 이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재산 압류 과정에서 나온 다수의 미술품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 전문위원은 천 화백의 작품으로 확인했고, 그림은 국가로 환수돼 국립현대미술관에 보관됐다. ‘미인도’라는 제목은 당시 검찰 직원이 압수품 분류 목록을 만들며 붙인 것이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전에 ‘미인도’를 전시하면서 위작 시비가 불거졌다. 행사 포스터로 ‘미인도’를 인쇄해 홍보용으로 활용했으나 이를 본 천 화백이 “내 그림이 아니다”고 미술관에 통보했다. 이후 미술관이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에 감정을 의뢰해 진품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자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을 모르는 부모가 있는가”라며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미술품 위조범으로 붙잡힌 권씨가 “내가 그렸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재연됐다. 권씨는 자신이 1984년에 ‘미인도’를 그렸다고 주장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작품이 이관된 것은 1980년이어서 제작 시기가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위작 논란은 계속됐고 천 화백의 유족들은 최근 미술관을 상대로 진위를 밝히기 위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권씨는 “내가 그린 것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아 2001년 미술관에 찾아가 ‘미인도’ 원본을 확인하려 했지만 보여주지 않아 무산됐다”고 말했다. 지난 2월 SBS스페셜에 출연한 권씨는 제작진의 부탁으로 ‘미인도’를 그려보며 자신이 그린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했다. 그는 “하루 만에 그렸으나 어딘지 낯설고 표현에도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내가 그린 기억이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미인도’에 대해 “진품이라 생각한다. 이번에 모사를 해보니까 머리 갈기 왼쪽 부분 채색의 변화와 표현은 천 화백 특유의 섬세한 필치와 감성으로 이뤄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동안 ‘미인도’를 진품이라고 주장해온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은 “권씨의 자백과 그림의 제작연도, 미술관 소장 연도가 달라 애초부터 권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SBS스페셜에 나와 ‘미인도’가 가짜라며 직접 재현까지 해보인 권씨가 보름 남짓 만에 주장을 번복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며칠 동안 인터뷰를 했는데 내가 나오는 분량은 얼마 되지도 않은 데다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진행된 방송에 들러리를 선 느낌이었다. 기분이 안 좋았다”고 토로했다. 방송 내용에 불만을 가진 권씨가 감정적인 대응으로 발언을 번복했다면 이 또한 진실성이 의심되는 대목이다.이광형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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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 위작 장본인 “내가 안 그렸다”… 주장 번복 파장
입력 2016-03-03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