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 칼럼] 오리지널보다 더 독창적인 것은 없다

입력 2016-03-04 18:59

이제 무인 자동차 시대가 곧 열릴 듯 해 보인다. AI(인공지능), VR(가상 현실)등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보도를 자주 접한다. 로봇이 인간을 대신할 정도가 아니라 능가하고, 가상이 현실 보다 더 리얼해지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고도의 과학기술이 숨막히는 속도를 내고 있다. 상상했던 것은 존재한다는 등식을 입증이라도 할듯이 과학의 진보는 눈부시다. 질문이 생긴다. 상상이 현실로 바꾸어 놓는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하는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뒤섞임, 인간을 대신한 기구들에 의존할 때 편리함보다 혼란이 오지 않을지 미래가 불안해진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가지고 너무 불안해 할 필요는 없지만 문명의 힘이 가져올 빠른 변화가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인지 질문해보면 왠지 답답한 마음이 밀려온다. 이유는 분명하다. 삶의 질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겉을 바꾼다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면의 혁명에서 비롯된다. 외부적 변화가 가져온 변형이 인간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

한국은 어디를 가나 인공미가 눈에 많이 띈다. 보석은 세공을 해야 더 영롱해지지만 힘이 가해짐으로 원형이 파괴될 위험성이 공존한다. 돈은 많이 들였는데 흉측스러운 개발을 보면 안타깝다. 인간의 손 때가 묻을수록 망가진 것들이 많다. 인간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구조적인 모순들이 문제다.

호주에서 살며 경험한 것은 10년, 20년이 되어도 별 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밋밋하고 지루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환경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다.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두려고 하고,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가능한 개발하지 않으려 했다. 시원하게 뚫린 길보다 좁고 구불구불한 길들이 많다. 파괴적 개발보다 원형 보존에 더 무게를 둔 것이다. 무엇보다 공간개념이 넓었다.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공적 공간이 많았다. 어떻게 보면 낭비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공간들이 많다. 곳곳에 크고 작은 공원들이 있다. 빌딩들도 있지만 여유로운 공간과 함께 적당히 공존하는 미가 있다. 공원과 같이 확 트인 공간들은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쉼을 제공한다.

우리는 조그만 공간만 있어도 그냥 두질 못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일까? 우리는 무엇인가를 계속 뒤집고 엎고 새롭게 쌓아 올린다. 각종 편의시설이라고 하는데 도리어 불편하고 요란스러워 보인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원형들이 훼손되는 일을 자주 목격한다. 우리의 문화 안에는 파괴적인 면이 많이 숨어있다. 인위적인 압력을 가하는 문화는 폭력적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강요와 억압 속에서 자란다. 그들이 가진 고유의 결을 살려줄 여유가 없다. 아이들에게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 갈고 닦아주기보다 부모가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도록 강제적으로 데리고 간다. 기다려주는 여유가 없다. 아이들의 얼굴에 기쁨이 없다.

한국이 아직도 노벨상과 거리가 먼 이유는 뭘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답이 나온다. 임의성이 너무 강하다. 우리는 얼굴을 고쳐야 하고, 뱃살도 기계로 빼야 하고, 뼈도 깎아내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못생기면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사회의 압력이 그렇게 몰아간다. 강요하고 억압하는 사회는 강박증세가 농후해진다. 불안사회다. 원인 모를 극도의 불안으로 정신과적 환자들이 폭증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격려하는 여유가 없다. 모두가 닦달과 채근에 시달린다. 무조건 뛰어야 한다. 뛰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 없다. 뒤쳐질 것 같은 마음은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실적주의와 결과주의에 내몰린 사회는 잔인하다.

요즘은 중학교 1학년 여학생도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한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 충분히 예쁜 아이들의 얼굴에 누가 짙은 립스틱을 바르도록 했을까? 치열한 경쟁과 무언의 강요와 억압은 불행한 문화를 만들어 낸다. 인위성이 가미될수록 창조의 원형 훼손을 막을 수 없다. 창조주가 만든 원형에 어설픈 인간의 기교는 아름다움이나 행복과 거리가 멀다. 원형을 깨는 문화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다. 퇴보를 막으려면 가지고 있는 것의 귀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무조건 새로움보다 오리지널의 보존이 더 귀중한 일이다. 오리지널보다 더 독창은 없다.

이규현 <부산 수영로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