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정치권은 우여곡절 끝에 선거구 획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이번 주말부터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4·13총선은 개성공단 폐쇄와 유엔 대북결의안 채택이라는 매가톤급 변수 속에 치러진다. 크리스천에게 정치와 선거란 무엇인가. 교계 원로 전용태 장로와 기독교시민운동가 양희송 청어람 ARMC 대표에게 7가지 질문을 던졌다.
전용태 공동총재 <세계성시화운동본부>
“크리스천 투표권은 ‘모세의 지팡이’… 영성·전문성 탁월한 목회자 등 선출 필요”
(1) 테러방지법에 도청과 불법 감청 가능성 등 독소조항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도 의견을 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국내에 들어온 무슬림이 50만명이 넘고 이슬람국가(IS)와 북한의 테러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야당이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 국회 본회의 통과를 지연시킨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다만 국민이나 야당의 정치를 사찰하는 도구로 악용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균형 잡힌 선거구 조정이 됐는지 의문이 든다. 수도권이 늘고 지방은 줄었는데 여야 간 상당히 정략적인 선거구 획정을 한 것 같다. 이런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를 막기 위해 선진국처럼 전문가에 의한 상설적인 위원회 구성이 필요하다.
(3) 우리 헌법상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지만 이것은 권위와 권력의 야합이나 국가의 교회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막자는 의미에서 제정된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교회는 존재가치가 없고 국가사회는 위기를 맞는다. 교회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고, 국가는 전 국민의 건강과 환경을 관리하는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의 정치 참여는 필수적이고 이를 포기하면 직무유기하는 셈이다. 교회가 침묵하면 국가는 침몰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4) 건전하고 복음적이며 영성이 살아 있는 기독교 정당이 필요하다.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일반 정당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다만 영성이 있고 전문성이 탁월한 목회자나 평신도가 의회에 진출해야 진정한 민주주의와 정치의 복음화를 이룩할 수 있다. 물 위에 떠있지 않는 배가 무슨 배이며 물 없이 고기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5) 크리스천의 투표권은 ‘모세의 지팡이’에 비유할 수 있다. 지팡이를 던지지 않고 어떻게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지금 영적, 도덕적, 사회적, 안보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 권위와 권력 아래서 잠자는 자의 자유는 보호되지 않는다. 이것은 세상법의 원리이면서 성경법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투표권을 포기하는 크리스천에게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네 믿음이 작으냐”고 책망하신다. 우리나라는 지금 정치에 대한 실망이 정치 무관심으로, 정치 무관심이 투표권 포기로, 투표권 포기가 자유민주주의 포기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이번 4·13 총선에서 일반 시민이나 크리스천을 망라해 국민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해야 한다.
(6)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라.” 신명기 17장 15절 말씀이다. 투표할 때에도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믿지 않은 사람이라도 긍정적인 태도와 자세를 겸비한 사람을 뽑는 것이 좋다. 우리는 지금 3가지를 모아야 한다. 첫째,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둘째, 기도를 모아야 한다. 셋째, 표를 모아야 한다. 그래서 ‘코리안 엑소더스’를 이뤄야 한다.
(7) 느헤미야는 성문이 불타고 성벽이 무너진 암울한 때 52일 만에 성벽을 쌓고 성문을 달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부흥을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동성애와 이슬람 침투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다. 여야는 심판의 대상으로 국민 앞에 더욱 겸손해야 한다. 야당은 선거 직전에 하는 진저리나는 야합 정치를 그만해야 한다. 여당은 집권당다운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소수와 약자를 잘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국민들은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무성(聽無聲)의 정치’를 원한다. 이제 염증 느끼는 흑색 비방선거를 그만하고 희망을 주는 정치로 환골탈태할 때다. 확고한 정체성과 정치적 의도, 견해를 밝히는 매니페스토(Manifesto) 선거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유권자는 정치 혐오를 이유로 강 건너 불구경 하면 안 된다. 반드시 한 표를 행사하되 학연과 지연 등을 따지지 말고 정책과 인물을 보고 투표해야 한다. 투표권은 포기할 수 있는 사권(私權)이 아니라 꼭 행사해야 하는 공권(公權)이기 때문이다. 기권은 자유가 아니라 일종의 방종이다. 우리나라도 호주처럼 투표권 포기자에게 벌금을 물리거나 불이익을 주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투표를 제대로 한 다음 비판해도 늦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양희송 대표 <청어람 ARMC>
“선거 때마다 지연·학연 활용하는 구태… 교회가 ‘종교연<緣>’ 작동하는 공간 안돼야”
(1) ‘테러방지법’이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통해 이 사안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국회가 진즉에 제대로 된 토론을 펼치고, 언론이 이를 보도해 주었더라면 민주주의가 훨씬 성숙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야당의 한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마무리하면서 한 말이 뇌리에 남는다. “우리 국민들은 불의와 불평등에 지쳤다. 대한민국은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필리버스터가 끝난 자리에서 다시 싸울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필리버스터에 열광하는 국민이 왜 많았는지 정치권은 곱씹어 봐야 한다.
(2) 전체적으로 인구 비례의 불균형을 시정한 부분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다만, 비례대표 의원이 더 늘어나는 것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지역 국회의원의 역할은 지방자치단체와 지방 의회가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과 지방의 숫자 변화보다는 지역구를 늘리고 비례대표를 축소한 것이 더 아쉬운 대목이다. 직능별 이익을 대표하거나 약자를 대변하는 비례대표가 늘어나야 한다.
(3) 기독교는 정치가 추구해야 할 근본적인 가치를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소외된 이들을 끌어안는 공존, 약자를 돌보는 사랑…. 교회는 정당이 추구하는 목표인 정략적 권력쟁탈보다 약자에 대한 주의를 환기 시키는 등의 역할을 상시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교회 내적으로는 민주적 시민의식을 자연스럽게 배양하는 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교회는 매주 만나 말씀을 나누고 교회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회의를 하는 곳이다. 기독교와 정치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해 놓을 대상이 아니다. 교회가 민주주의 장이 될 수 있고, 정치는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는 더 넓은 장이 될 수 있다. 크리스천은 오히려 정치적 독해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4) 정치 참여는 민주주의 사회가 보장하는 자유이다. 막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선거 때마다 급조된 정당이 나오는 건 생각해볼 문제다. 이런 정당이 선거 때마다 나타나서 선정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은 기독교의 공적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희화화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미 국회의원 중에는 30∼40%가 개신교인이다. 이들을 상대로 기독교계가 공감하는 정책을 요구하면 된다. 기성 정당 내의 기독인들이 의미 있는 정치활동을 해내도록 격려하고 자극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참여 방식이라 본다.
(5) 서구에서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등장 과정에서나 시민권 운동에서 개신교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매우 컸다. 16세기 전반 유럽의 종교개혁 후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타락한 종교 권력에 대한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불의한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에 반대해 1960년 4·19의거가 있었고, 권위주의 정권의 종식을 요구하며 87년 6월항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우리는 사회의 변화 국면에서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 또 공정한 절차적 정의 확립 등은 교회 안에서 강조되어야 한다. 투표는 ‘참여’이자 ‘정의’다.
(6) 선거 때마다 지연이나 학연을 활용한 운동을 많이 하는데, 교회가 ‘종교연(緣)’이 작동하는 공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투표하는 분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회가 민주주의의 장이 되기 위해서는 가치 지향과 정치적 소신이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아온 이에게 표를 주는 것이 좋다. 특히 민주주의의 위기이자 경제적 위기란 인식이 큰 상황이다. 이 점에서 뚜렷한 역량이 있는 이들이 당선되기를 기대한다.
(7) 대통령 임기 중반에 치러지는 총선은 집권세력에 대한 중간평가의 의미가 크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 전반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민주주의 기조보다는 상명하달식 독단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안타깝다. 또 그동안 야당이 제대로 된 기능을 못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야당은 수권 능력이 있는지 정책 개발과 정치적 역량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현재 여야는 모두 잘게 쪼개져서 자기 계파의 이익만을 계산한다. 협량한 정치에 함몰되어 있다. 여야 모두 중요한 국가적 과제들에 대해서도 놀랄 만큼 무책임하거나 무능력하다.
유능한 수권 정당으로 신뢰를 쌓기 바란다. 최소한 우리 정치권이 건전한 보수 양당 체제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나아가 소수 정당들도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 환경이 되면 좋겠다. 현명한 유권자들의 선택으로 경제적 양극화를 해소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여할 이들이 많이 뽑히길 기대한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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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3-04 21:05 수정 2016-03-08 1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