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필리버스터’ 정국이 지나갔다. 의회에서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방법을 사용하는 야당이 안쓰럽게 느껴지거나 동정이 가지 않는다. 단지 대한민국의 정치가 실종되었다고 느낄 뿐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정치’는 사람들 사이의 의견 차이나 이해관계를 둘러싼 다툼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도시국가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polis’에서 ‘정치(politics)’가 유래했다. 도시국가 간의 상충되는 이해를 조절한다는 의미다. 정치는 아이들의 놀이에서도 일상적으로 적용된다. ‘무얼 하고 놀까’ 생각하면서 서로 다른 취미와 생각을 모으는 과정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결국 정치란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함께’하는 게임이다.
영어 단어 ‘relationship(관계)’은 ‘한 배를 탔다’는 말이다. 배에 문제가 생기면 함께 탄 모든 사람이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다. 관계의 문제는 ‘공동의 문제’라는 인식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관계의 문제가 힘든 것은 누구의 잘못인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못하고 도식적으로 정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정치 정국을 보면 마치 ‘치킨게임’을 보는 듯하다.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정치는 실종되었다.
‘관계’의 본질적 문제는 ‘욕심’과 ‘질투’라는 두 개의 단어에서 가장 명확하게 설명된다. 문병하 목사는 저서 ‘오늘은 시작하기 좋은 날입니다’에서 이 둘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욕심이 내가 갖고자 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라면, 질투는 남이 가진 것을 시기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욕심은 나에게 채워지지 않는 것으로 마음이 상하는 것이라면, 질투는 남이 가진 것 때문에 내 영혼이 상처를 받는 것이다.” 영혼과 마음에 상처가 나면 작은 자극에도 쓰리고 아프게 된다.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예민해지고 더욱 공격적이 되며 관계는 점점 나빠지게 된다.
성경에 보면 최초의 욕심은 아담에게서 시작되었다. 더 좋은 것을 갖고자 원했던 아담에게 찾아온 것은 만족이 아니라 ‘선악과’의 유혹이었다. 그의 아들 가인에게서 ‘질투’가 시작되었다. 동생 아벨과 함께 제사를 드렸으나 자신의 제물이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이다. 욕심과 질투는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질투가 욕심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이유는 욕심은 개인적인 것에서 머무르지만 질투는 관계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에서 “삶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행복은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욕심과 질투를 극복하는 길은 ‘관계’ 속에서 서로를 보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이 비통해하는 것을 내가 지닌 행운보다 더 즐겼지요. 내가 받은 축복에 즐거워하기보다는 남이 안 되고 힘들어하고 애통해하는 것을 더욱 즐거워했습니다. 남의 기쁨, 남이 잘되는 것을 도무지 봐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파멸해야 오히려 속이 시원했습니다.” 이 말은 질투로 가득 찼던 자가 연옥에서 고통을 받으며 하는 말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일이 연옥에서 고통 받는 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대한민국이라는 한 배는 ‘공동의 문제’라는 관계의 인식이 필요하다. 양 극단에 선 사람들의 욕심과 질투는 마치 연옥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서 보일 뿐이다. 행복한 대한민국이 그립고 그래서 기대하게 된다.
김병삼 만나교회 담임목사
[바이블시론-김병삼] ‘정치의 실종’은 관계의 문제다
입력 2016-03-03 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