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떼가 나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나는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왜 그곳에 있는지 알 수 없어 두리번거리면서. 끝없이 이어진 모래 언덕과 언덕들 너머로 희뿌연 흙먼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코끼리들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지만 저절로 깨닫는 일이 있다. 반대로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나 혼자 한동안 모르는 일도 있다. 꿈속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코끼리 떼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을 때, 사막 한가운데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코끼리들은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코끼리 떼와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게임의 규칙은 단순했다. 코끼리들이 다가오고, 내 앞으로 지나가고, 그리고 사라질 때까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아야 한다. 소리를 지르면 진다. 지면 잡아먹힌다. 물론 코끼리는 사람을 먹지 않는다. 나를 잡아먹는 것은 코끼리가 아니다.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 코끼리 떼가 내 앞을 지나갔다. 코끼리들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고 편안하고 고요하게 숨을 쉬었다. 이마가 높고 집채만 한 코끼리가 하얀 상아를 빛내며 선두에서 걸어갔다. 코끼리는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고 한다. 그러니 무리에서 가장 큰 코끼리가 가장 오래 산 코끼리일 것이다. 코끼리는 기억력이 뛰어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가장 몸집이 큰 코끼리는 길고 긴 기억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나고 꿈을 꾸고 있는 사람도 나다. 꿈은 내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거나 꼭 해주고 싶은 말일 것이다. 코끼리 떼는 왜 나의 꿈속으로 걸어 들어왔을까. 결국 나는 게임에서 졌던가.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 속에서 코끼리를 보며 함부로 환호하거나 함부로 비명을 질렀던가. 너무 쉽게 터져 나온 환호와 비명에 잡아먹혔던가. 코끼리들은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성급하지 않게, 길고 느리게 숨 쉬는 법을.
부희령(소설가)
[살며 사랑하며-부희령] 길고 느리게
입력 2016-03-03 1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