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학대·N포 세대·분노·절망의 사회, 왜 이럴까요… 한성열 교수에게 묻다

입력 2016-03-04 20:28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가 지난해 11월 서울 강남구 성암아트홀에서 열린 심리학콘서트 ‘괜찮아, 괜찮아’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강훈 작가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이 적혀 있는 연구실 칠판(위)과 한성열 교수. 전호광 인턴기자
자녀를 향한 부모의 잔인한 폭력, 부모의 가난을 자조하는 청년들의 ‘흙수저론’, 노후가 없는 중년의 한숨…. 분노와 절망으로 뒤덮인 우리 사회의 ‘심리 검진’을 받기 위해 문화심리학의 대가(大家) 한성열(65·시온감리교회)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를 찾았다.

내년 정년퇴임하는 그는 미 시카고대에서 긍정심리학의 선구자 칙센트미하이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짙은 파란색 상의를 입은 그는 나이에 비해 젊어보였다.

최근 서울 성북구 고려대 연구실에서 만난 한 교수는 “부모의 폭력, 청년의 ‘흙수저’론 등은 모두 가부장제의 바탕인 가족동일체 의식의 영향 아래 있다. 성숙하지 않은 이들은 이 의식을 바탕으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쉽게 분노하거나 좌절한다”고 진단했다. 문화심리학은 인간 심리가 그 문화와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관점에서 연구한다. 국내에서는 고려대에 유일하게 박사과정이 있다.



자녀학대, 가족동일체 의식의 비극

-근래 장기결석 아동 전수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참혹한 학대 사례가 충격을 주고 있다. 부모의 폭력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부모 개인의 내적인 문제가 작용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부모와 자녀가 동일체란 의식의 영향이 크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동일체라는 것이다. 자녀가 반항하면 부모는 화를 낸다.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하는데 왜 내 말을 안 듣느냐’는 생각이다. 가정 밖에서는 화를 참지만 가정 안에서는 화를 참지 않는다. 부모의 화를 억제하는 심리적, 사회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어떤가?

“미국 등 서구에서 부모는 자녀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생각한다. 자녀에게 개성이 있다고 보고 그 의사를 존중한다. 자녀의 의사가 자신과 달라도 포용하려 애쓴다. 아동학대 처벌도 엄격하다.”

-동일체 의식은 어떤 면에서 공동체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지 않나?

“전통사회의 골간은 부계 중심의 가부장제였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의 ‘화(和)’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가정이 통일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화’는 불가능하다.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공부하고 일하는 집이 많다. 자녀들도 개성을 추구하도록 교육받는다. 그런데 아직도 ‘한목소리’를 화목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최근 상담한 한 남성은 이혼을 고려하고 있었다. ‘아내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지난 대선에서 나와 다른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하더라.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의 진심이었다. 부부 일심동체 의식이다. 곧 국회의원 선거가 있지 않나. 가족들이 선거로 갈등하는 사례가 생각 외로 많다.”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면 가정이 화목해지는 것인가?

“음악에 비유해 보겠다. 전통적인 가정의 화목은 국악 합주처럼 단일한 선율, ‘하나 됨’이다. 반면 서양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선율을 연주한다. 가장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각기 다른 소리가 모여 아름다운 소리가 나도록 해야 한다. 단시간에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 문화는 커다란 항공모함과 같아서 방향을 트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우리 가족의 경우 부부와 2남1녀가 매주 일요일 저녁 가족회의를 한다. 자정이 넘도록 얘기할 때도 있다. 오래 노력했다.”



아버지,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라

-가정을 아름답게 지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끊임없이 성숙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난달 경기도 부천의 한 목회자가 자녀를 숨지게 한 사건을 떠올려봐라. 우리는 막연히 공부를 많이 하거나 종교를 가지면 인격이 성숙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부천 사건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목회자나 교육자를 선발할 때 인격적 성숙도를 먼저 봐야 한다.

나의 경우 자녀들이 내 성숙을 도왔다(웃음). 첫째아들이 1998년 대학 입시에 실패한 뒤 가출을 했다. 수소문해보니 강원도 태백의 한 절에 들어갔더라. 아내는 울면서 아들한테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고, 주변에서는 절로 갔는데 그냥 두느냐고 걱정을 했다. 다행히 아들은 7∼8개월 뒤 제 발로 들어왔다. 엄마에게 줄 성경책을 선물로 들고서.

심리학이나 신앙생활에서 자녀에게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배웠다. 나도 그때 기다리는 게 참 힘들었다. 제일 어려운 게 부모 노릇이더라. 자녀들이 부모에게 반발하는 이유는 대부분 부모의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말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면서 실제론 공부 중심의 생활을 아이에게 강요한다. 이 괴리가 자녀들에게 실망감과 분노를 안겨준다.”



대학가에 시위가 사라진 이유…

-요즘 청년들은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 세대로 불리다 이젠 N포(모든 것을 포기) 세대로 불리고 있다. 스스로를 ‘흙수저’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흙수저라고 부르는 것은 ‘내 부모가 부유하지 않기 때문에 내 인생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부모와 자녀가 동일체라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부모가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50, 60대 부모 세대는 청년들에게 물려줄 것이 별로 없다. 자산을 모으지도 못했는데 명예퇴직을 당하고, 자녀들은 취업준비 중이다. 우리 사회가 ‘일자리가 없다’ ‘경기가 나쁘다’며 청년들에게 지나치게 불안을 조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청년들이 세상과 맞서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 대학가에 시위가 싹 사라졌다. 청년들이 자기 삶을 버거워하다보니 이 사회를 걱정할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시위거리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중년, 미안해하지 말고 제2, 3의 삶 준비

-부모 세대는 정리해고나 명예퇴직 상황에 놓여 있다.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50, 60대는 참 불쌍한 세대다.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자식의 봉양을 못 받는 첫 세대다. 부모의 병수발과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가진 것을 다 내놓고 남은 것은 ‘긴 노후’뿐인 세대다. 우리 노동시장 구조가 정년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제 제2, 제3의 커리어를 준비해야 한다. 부모에게 원하는 만큼 효도 못해 미안해하고,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못하는 걸 미안해 할 필요 없다. 미안해할 게 아니라 각자의 삶을 준비해가야 한다. 어쩌면 청년, 중년, 노년 모두 외롭고 힘들다.”

-깨지는 가정도 많고 그 속에 힘든 개인도 많다. 목회적 차원에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는 항상 시대적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답해 왔다. 일제 강점기 기독교는 독립운동을 했고, 독재정권 때는 민주화운동을 했다. 최근엔 이 기능이 거의 상실된 느낌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치유’다. 모두가 다 아프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상담에 관심을 갖고 이들을 치유해주면 좋겠다. 올해 9월부터 목회자들을 위한 상담 아카데미 ‘예상’을 열 예정이다.”

그는 예상 사역을 통해 한국교회가 상처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는 데 힘을 쏟을 계획이다. 그의 연구실 한쪽에 있는 칠판에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이것이 신앙’이라는 실존주의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이 적혀 있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