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분과 같은 하키맘(Hocky Mom)이다. 하키맘과 투견(Pitbull)의 차이는 립스틱이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존 매케인 후보의 러닝파트너로 지명된 새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가 연설할 때 미국은 열광했다. 5명의 자녀를 키우며 일을 병행하는 ‘억척맘’의 등장에 30, 40대 주부층은 테 없는 안경과 올림머리, 립스틱 색깔을 따라하며 대리만족감을 느꼈다.
페일린 신드롬에 힘입어 매케인 지지율은 당시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를 앞질렀다. 페일린은 차기 대권 후보감으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중에 TV토론과 대담 등을 거치면서 페일린의 실체가 드러나자 거품은 꺼졌다. 한국과 북한을 혼동하는 등 무지와 자질론이 파죽지세로 치닫던 페일린과 공화당의 발목을 잡았다.
1일(현지시간) ‘슈퍼 화요일’을 거치면서 미 공화당 대선 유력 주자 자리를 굳힌 도널드 트럼프. 테러 용의자를 물고문하자고 하고, 멕시코 이민자들을 강간범으로 몰아세운다. 여성 앵커를 향해선 “눈에서 피가 났다. 다른 어디에서도 피가 나왔을 것”이라며 여성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경쟁 후보나 멕시코 전직 대통령, 교황에 이르기까지 공격 대상도 가리지 않는다.
‘트럼프를 지게 하는 5가지 방법’(뉴욕타임스),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를 모욕한 것’(워싱턴포스트), ‘트럼프 지지는 인종·성차별적 신념에 동의하는 것’(CNN) 등 미국 주력 언론들이 아무리 트럼프를 깎아내려도 지지율은 꺾일 줄 모른다.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처럼 공직 경험이 있고 대통령을 지낸 아버지와 형을 둔 정치가문 후보는 유권자들에게 철저히 버림받는 시대다.
페일린이나 트럼프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미국 대선판을 휘젓고 있는 이유는 뭘까. 미국이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적인 사회가 맞나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교훈은 명백하다. 국민들은 더 이상 ‘양치기 정치권’에 표를 주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후보의 공약을 믿고 표를 던졌지만 번번이 실망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의 E J 디온 주니어는 최근 펴낸 ‘미국의 보수는 왜 잘못 가고 있는가’에서 트럼프 열풍의 원인을 지난 50년간 미국 보수가 걸어온 ‘실망과 배신의 악순환’에서 찾는다. 역대 보수주의 정권은 선거 때 지지자들에게 내건 ‘약속’을 집권 후 거의 지켜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더 이상 희망을 주지 못하는 시대에 새로운 인물이 답답한 현실을 타개해줄 것이란 기대를 거는 것도 트럼프 열풍의 이유 중 하나일 거다.
세계적인 석학 노암 촘스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는 ‘트럼프 열풍’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진단한다. 대공황 직후인 1930년대는 가난한 노동자와 실업자들 사이에도 노동운동이 활기를 띠고 비주류 정치 단체들이 존재하면서 일종의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등장으로 사회가 붕괴되면서 희망이 사라지고 분노와 공포, 좌절, 절망만 가득한 저학력·저소득 백인 소외계층에게 트럼프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선거는 미래에 대한 결정이다.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겠다며 세계 최장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쇼를 펼치고, 총선이 40일 앞으로 다가오도록 선거구 획정조차 못하고 싸움만 벌인 정치권, 선거 때면 달콤한 공약으로 표를 얻어가고 선거가 끝난 뒤에는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는 정치권에 국민은 더 이상 희망을 걸지 않는다. 국민이 외면한 정치는 ‘돈키호테’가 판치면서 희화화될 수밖에 없다는 걸 미국 대선이 보여주고 있다.
이명희 국제부장 mheel@kmib.co.kr
[데스크시각-이명희] 트럼프 열풍은 정치권 향한 복수
입력 2016-03-02 17:32 수정 2016-03-02 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