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가 남긴 기록과 에피소드… 8일간 170시간 넘기며 세계 최고기록

입력 2016-03-02 04:03

테러방지법 국회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야권이 벌인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릴레이’는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갖가지 진기록을 남겼다. 야당 의원들은 경쟁하듯 최장시간 발언 기록을 갈아 치우며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냈다.

릴레이의 스타트는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끊었다. 김 의원은 지난 23일 오후 7시6분 연단에 올라 5시간32분간 쉬지 않고 연설했다. 1964년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동료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를 막기 위해 연설한 5시간19분을 뛰어넘는 기록이었다.

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이 세운 국회 본회의 최장발언 기록(10시간15분)을 처음 경신한 의원은 더민주 은수미 의원이었다. 은 의원은 지난 24일 세 번째 주자로 나서 10시간18분간 단상을 지켰다. 같은 당 정청래 의원은 사흘 뒤 11시간39분간 연설하며 은 의원 기록을 다시 갈아 치웠다.

1일까지 야당 의원들이 바통을 이어받으며 연설한 시간은 총 170시간이 넘는다. 2011년 캐나다 새민주당 의원 103명이 세운 필리버스터 시간(58시간)을 가뿐히 뛰어넘는 ‘세계기록’이다.

장시간 연단에 서서 발언하기 위한 의원들의 준비도 눈길을 끌었다. 정의당 박원석 의원은 정장 차림에 파란색 운동화를 신고 연단에 올랐다. 신경외과 의사 출신인 정의화 의장은 필리버스터에 나선 의원들의 허리 건강을 걱정해 ‘발판’을 설치해주기도 했다. 1일 단상에 오른 더민주 안민석 의원은 의장단에 양해를 구하고 토론자 중 처음으로 화장실에 다녀왔다. 정의당은 이날 정진후 심상정 의원이 토론을 신청하면서 정의당 소속 의원 전원(5명)이 필리버스터에 동참하는 기록을 세웠다.

필리버스터가 진행된 8일 동안 본회의장에서는 여야 의원들의 고성이 자주 오갔다. 하지만 공천에서 배제된 의원이 토론자로 나설 때면 본회의장엔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더민주 강기정 의원은 사실상 공천 배제 통보를 받은 지난 25일 밤 아홉 번째 주자로 단상에 올랐다. 그는 발언을 하다가 수차례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훔쳤다. 강 의원은 5시간 넘는 연설을 마친 뒤 “이 자리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노래했다. 발언대에서 내려오는 그를 향해 새누리당 소속 정갑윤 국회부의장은 “나와 줘서 고맙다. 사랑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강 의원 외에도 더민주 공천에서 배제된 김현 전정희 임수경 의원 등이 토론자로 나서 힘을 보탰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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