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 보유자 선정 논란… 제도 개선 시급

입력 2016-02-29 20:57
중요무형문화재 태평무 보유자로 인정 예고된 양성옥씨(위 왼쪽 사진). 양씨와 함께 심사를 받았다가 탈락한 뒤 이의를 제기한 박재희, 이명자, 이현자씨(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가 춤을 추는 모습. 국민일보DB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보유자 선정을 둘러싼 갈등이 커지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 2월 1일 양성옥(62)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태평무 보유자로 인정 예고했지만 당시 같이 심사를 받았던 이현자(80) 이명자(74) 박재희(66)씨가 모두 불복하고 나섰다. 또한 김매자 창무예술원 이사장과 배정혜 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등 국내 주요 무용가 36명도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29일 문화재청에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태평무 보유자 선정 논란 일파만파=문화재청은 지난해 11∼12월 태평무와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제27호 승무에 대한 보유자 인정 심사를 실시했다. 살풀이춤과 승무는 인정 예고를 보류했지만, 태평무에는 양성옥씨를 보유자로 인정 예고했다. 30일간 공고해 별다른 이의가 없으면 심의를 통해 보유자 인정이 확정된다. 하지만 다수의 이의가 제기됨에 따라 문화재청은 재심의를 해야만 한다.

태평무는 20세기 초반 ‘한국 근대춤의 아버지’ 한성준 선생이 경기도 무속음악과 춤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한성준의 직계 손녀인 한영숙(1920∼1989)류(流)와 제자인 강선영(1925∼2016)류로 나뉘어 전승돼 왔다. 한영숙은 1969년 승무와 71년 제40호 학춤 보유자가 됐지만 88년 태평무 보유자 선정 당시 건강 등의 이유로 제외됐다.

이번에 태평무 보유자 심사를 받은 4명 가운데 이현자, 이명자, 양성옥씨 등 3명은 강선영류이고, 박재희씨만 한영숙류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승무, 살풀이 등은 유파별로 인정했지만 태평무의 경우 강선영류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해 왔다. 박재희씨는 “강선영류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한영숙류는 단절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양씨가 보유자로 인정 예고된 데 대해 같은 강선영류에 속하는 2명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3명은 강선영의 전수교육조교였는데 양씨가 가장 후배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현자씨는 양씨의 스승으로 태평무를 이수시킨 주역이다. 게다가 양씨가 신무용계 대모 김백봉의 직계 제자이기도 해 보유자의 첫 번째 선정 조건인 ‘태평무를 원형대로 보존한다’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본래 취지 사라진 인간문화재 제도=중요무형문화재는 1962년 제정 및 공포된 문화재보호법을 기반으로 한다. 64년 종묘제례악(1호)을 필두로 2015년까지 125개 종목이 지정됐다. 보유자로 지정되면 매달 지원금과 전승활동비를 받는다. 또 각종 전승교육을 도맡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자들이 모이게 되고 이는 곧 돈과 직결된다. 일각에서 인간문화재가 ‘문화귀족’으로 불리는 이유다. 실제로 높은 예술성을 지녔음에도 지정받지 못하는 바람에 제자가 없어 맥이 끊기는 경우도 많다.

특히 전수자로 시작해 이수자, 전수교육조교, 보유자 후보 순으로 올라가는 전승교육 과정에서 보유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미래의 인간문화재를 꿈꾸는 제자들은 스승에게 절대적인 복종과 봉사를 할 수밖에 없다. 태평무 보유자 심사에서 이현자, 이명자씨가 후배 양성옥씨의 보유자 인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는 데에는 이런 사정도 있다.

보유자 선정 잡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독보적 존재로 인정받던 1세대 보유자들의 별세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엇비슷한 기량의 문하생들 사이에서 지정 결정에 불복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윤중강 국악평론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도가 초창기에는 전통문화 발전에 큰 도움이 됐지만 근래 들어 보유자 지정을 둘러싼 부작용이 심각하다”면서 “판소리, 산조, 태평무, 승무를 포함해 전승이 잘되는 분야는 중요무형문화재에서 제외하는 등 엄격한 운영 방침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장승헌 무용기획자는 “지난해 심사한 태평무, 승무, 살풀이 중 태평무가 그래도 논란의 소지가 적은 분야였다. 각각 13명과 7명이 심사받은 승무, 살풀이는 나중에 더 큰 갈등이 불거질 것 같다”며 “처음 생길 때와 지금은 예술적 환경이 많이 다른 만큼 제도를 현재에 맞게 고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