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3·1 독립만세 함성 흔적 간데없고… 그 자리엔 역사의 망각만이

입력 2016-03-01 04:07 수정 2016-03-01 10:01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29명이 기미독립선언서를 선포했던 서울 종로구 태화관 자리엔 12층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재미교포 여영필씨 부부가 이날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안에 설치된 손병희 선생 동상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다.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 앞길에 ‘돈의문(서대문) 터’라고 적힌 표지물만 서 있다. 돈의문은 1915년 도로 확장공사 명목으로 철거됐다.
3·1운동 당시 매일신보사가 있었던 서울시청 앞에 태극기가 깃대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다. 이 태극기는 시민단체가 동성애 반대 시위를 하면서 내걸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음식점 태화관에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모였다. 조선독립을 선포하는 ‘기미독립선언서’가 세상에 나오는 순간이었다. 같은 시각 태화관에서 불과 300여m 떨어진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 5000여명이 흥분에 가득 차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만세운동은 서울을 넘어 전국 각지로 뻗어나갔다. 그해 3월 3일 간행된 조선독립신문은 당시 상황을 ‘수많은 학생이 너무나 기뻐 손을 흔들고 발을 굴리니 어찌 목이 메지 않으리오’라고 묘사했다.

함성과 열망으로 가득 찼던 그 공간은 97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숨 가빴던 역사의 현장을 후손들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국민일보 취재팀이 97주년 삼일절을 맞아 3·1운동의 주요 현장을 둘러봤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그날’을 역사의 기억 속에 묻어두고 있었다.

여기가 독립만세운동 현장이라고요?

29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태화빌딩. 민족대표가 모였던 태화관 자리에 지상 12층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입구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비석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빌딩 1층 로비에는 ‘민족대표 삼일독립선언도’라는 그림이 붙어 있다. 민족대표 29인이 둘러앉아 독립선언서를 검토하는 모습을 그렸다. 비석과 그림, 두 흔적만이 ‘3·1운동의 시발점’을 알려준다.

빈약한 징표 탓일까. 지나치는 사람들은 이 공간의 의미를 잘 몰랐다. 30분 남짓 동안 수백명이 태화빌딩 앞을 지나쳤지만 누구도 비석 앞에 멈춰서거나 비석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 빌딩에 직장이 있다는 송모(32)씨는 “이곳에서 독립선언이 있었다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알았다”고 답했다.

탑골공원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날 탑골공원 입구 삼일문 오른편에는 가로 3m, 세로 2m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삼일절을 기념하기 위해 내건 게 아니었다. 한 보수단체가 일본을 향해 대마도를 반환하라는 집회를 열면서 부착해 놓은 것이다.

탑골공원 안에는 손병희 선생 동상과 함께 삼일운동기념동판부조 10개가 전시돼 있지만 사람들은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갔다. 몇몇 노인도 “큰 관심이 없다”고 했다. 탑골공원에서 만난 프랑스인 캘런(41·여)씨는 “가이드북에서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둘러보러 왔는데 사람도 없고 휑한 것 같다”고 했다.

말레이시아 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은 이모(40·여)씨는 “삼일절을 맞아 역사적 장소를 소개하려고 왔는데 방치된 것 같아 너무 민망하다”고 했다. 여행 왔다는 재미교포 여영필(62)씨도 “공원 앞에 있는 태극기를 보고 들어왔는데 사람이 없고 허전해서 이상하다”고 말했다.

남대문과 덕수궁 대한문, 미국 영사관과 경복궁 앞, 서대문(돈의문) 등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간 곳마다 ‘그때’를 떠올리기는 어려웠다. 당시 매일신보가 있던 자리는 현재 서울시청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독립운동의 현장이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덕수궁 앞에서 만난 미국인 여행객 마크(35)씨는 “거리에 걸린 태극기 외에 내일이 삼일절임을 알게 해주는 게 전혀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3·1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맞은편 길 위에선 ‘평화의 소녀상’이 눈을 맞고 있었다. 곁에서 ‘한일협상안폐기 대학생대책위원회’ 소속 A씨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두꺼운 외투를 여미고, 이불을 겹겹이 덮었지만 추위를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지난 연말 한·일 양국이 위안부 문제에 합의한 뒤로 소녀상이 철거될까봐 지키고 있다고 했다.

이름을 묻자 그는 “대책위 관계자라고만 알아 달라. 인터뷰 잘못하면 경찰서에서 소환장 날아온다”고 했다. 개강하면 학교에 가야 하고, 졸업반이니 취업도 준비해야 하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눈물에 가슴이 아파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상 앞을 지나가던 시민 박모(48)씨는 “위안부 협상을 둘러싼 논란조차 사그라들고 있다”며 “잊혀가는 역사를 환기시킬 수 있는 복원작업과 성숙한 시민의식이 절실해 보인다”고 말했다.

박세환 신훈 김판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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