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 번째 시집 낸 송경동 시인 “농성장이든, 집회 현장이든 눈에 띄는 종이에 詩를 썼죠”

입력 2016-02-29 18:52

‘희망 버스’ 기획자로 더 잘 알려진 송경동(49·사진) 시인은 ‘노동 시인’ ‘거리 시인’으로 불린다.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 내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땜빵 시인’이 더 듣기 좋은 별명이라며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집회 때 펑크 난 프로그램을 대신 해주는 시 낭송이 가장 행복하단다.

어느 별명이든 다 그의 삶을 얘기한다. 이슈가 있는 현장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전업활동가’로 살면서 시를 쓰는 그는 “책상에 앉아서 시를 써본 적이 없다. 시라는 게 다가오면 농성장이든, 집회 현장이든 어디든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 종이에 쓴다”고 말했다. 그렇게 거리에서 쓴 시를 묶어 세 번째 시집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창비)를 냈다.

제목이 심상치 않다. 요즘 청년들의 ‘헬 조선’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곰곰 읽어보면 한국 사회에 대한 청소년층의 책임성 없는 환멸과는 다르다.

“나는 한국인이다/ 아니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중략) 나는 피룬이며 파비며 폭이며 세론이며/ 파르빈 악타르다/ 수없이 많은 이름이며 (중략) 국경을 넘어선 폭동이며 연대이며”(‘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일부)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 한국 공장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소재로 한 이 시에서 그는 “작은 민족주의, 작은 국가주의를 넘어서 자본의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대응을 할 것”을 주장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 조합주의, 세속화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의 표제시 ‘사소한 물음들에 대한 답함’에서 밝혔던 것처럼 그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이며, 노동자 출신”이다. 어떻게 시인을 꿈꾸고 시인이 되었을까. “중2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처음 칭찬이란 걸 들어봤어요. ‘넌 참 시를 잘 쓰는구나’하고….”

고교 졸업 후 여천석유화학단지 등에서 용접공, 배관공 등으로 일했지만 시인이 되고 싶었다. 전남 보성 출신으로 22세 때 상경을 결심한 건 문학을 해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낮에는 일하며 저녁에는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창작을 배웠다. 그러나 20, 30대는 정작 자신의 작품 활동보다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글쓰기를 돕는 활동을 했다.

30대 후반에 들어서야 자신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천상병시문학상(2010), 신동엽문학상(2011)을 받았으니 관록이 만만치 않다.

그의 시는 사회활동가로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공고한 자본의 벽과 좌절, 다시 쓰는 희망이다. 때로는 신문 뉴스에나 나올 법한 기록이 이어진다. ‘H빔에 발가락 물린 최씨’ ‘비 오는 날 용접선에 달라붙은 황씨’ ‘비정규직 철폐 연대가를 부르며 오르던 기륭전자의 은미’ ‘베트남 노동자들 최저임금은 12만원이었다.’ 그럼에도 묘한 울림이 있다. 신문에도 나지 못하는 날것의 팩트, 그 아픈 현실에서 그가 길어 올린 사유와 반성은 통증을 수반하는 감동을 준다.

글=손영옥 선임기자, 사진=윤성호 기자 yosohn@kmib.co.kr